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나이스신용평가가 SK하이닉스의 장기신용등급 전망을 기존 ‘AA 안정적(AA/Stable)’에서 ‘부정적(AA/Negative)’으로 하향 조정했습니다. 90억 달러(10조3104억원) 규모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부문 인수가 회사에 짐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인수자금 조달에 문제가 없을 거라는 시장의 예상과는 다른 결론이죠.

나이스신평은 등급 변경 이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텔의 낸드 사업부 인수로 인한
1) 인수자금 조달에 따른 재무 부담 확대
2) 낸드 비중 확대로 향후 수익성 측면의 안정성 저하

신용평가사가 기업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하면 기업은 재무 부담이 커집니다. 신용등급이 실제로 떨어질 가능성이 생기고, 이에 회사채 발행 금리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번 인수가 SK하이닉스 재무에 ‘얼마나’ 부담을 줄까 하는 부분입니다. 워낙 덩치가 큰 M&A이다 보니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구할지에 대한 질문은 지난 컨퍼런스콜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은 1차 딜 클로징 시점인 2021년 말까지 인텔에 줘야 할 70억 달러(약 8조192억원) 가운데 절반은 현금과 영업활동현금흐름으로 조달한다고 밝혔습니다. 나머지는 차입 등 외부 조달을 하면서 필요하면 자산 유동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했죠.

▲  SK하이닉스 2020년 재무여력. /자료=사업보고서
▲ SK하이닉스 2020년 재무여력. /자료=사업보고서

일단 2020년 상반기 SK하이닉스의 재무여력을 보면 절반의 자금 조달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당장 현금및현금성자산만 4조원 가량 비축됐고 여기에 단기금융상품·단기투자자산 등유동성자산을 합치면 5조2000억원을 훌쩍 넘는 충분한 돈이 마련됩니다.

신용평가사에서 우려하는 부분은 나머지 자금을 차입으로 조달할 경우 생기는 재무 부담입니다. 2017년 투자한 ‘키옥시아(KIOXIA)’는 중장기투자로 지분 매각은 실현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결국 나머지 4조원 가량의 자금 조달 방법은 차입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소 거친 방식입니다만, 현 수준의 재무 상태에서 4조원의 차입이 반영될 경우 재무 구조가 얼마나 나빠지는지 살펴봤습니다.

총자산에서 순차입금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순차입금의존도는 기존 12.40%에서 17.19%로 4.79%포인트, 부채비율은 40.19%에서 48.29%로 8.10%포인트 증가합니다. 워낙 재무 건전성이 뛰어난 탓에 무려 4조원의 차입도 재무 건전성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아 보입니다.

▲  SK하이닉스 2020년 상반기 차입금에 4조원을 더할 시 순차입금의존도는 17.19%, 부채비율은 48.29%로 각각 늘었다. /자료=사업보고서
▲ SK하이닉스 2020년 상반기 차입금에 4조원을 더할 시 순차입금의존도는 17.19%, 부채비율은 48.29%로 각각 늘었다. /자료=사업보고서

다만 시장에선 크게 두 가지 변수가 우려 사항으로 거론됩니다. 우선 다롄 공장에 대한 투자가 지속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SK하이닉스는 컨퍼런스콜에서 이 공장이 향후 2~3세대 공정전환이 가능할 것이며 투자는 "자체적으로 창출되는 영업 현금흐름으로 커버한다"고 밝혔습니다.

문제는 낸드 시황입니다. 2017~2018년 슈퍼사이클 당시 20%대까지 올랐던 인텔 낸드사업부 영업이익률은 2019년 1~3분기 글로벌 낸드 회사 간 ‘치킨게임’에 휘말리며 –30~-40%까지 하락합니다. 다행히 지난 상반기엔 언택트 흐름을 타고 매출 28억 달러(약 3조원), 영업이익 6억 달러(약 6700억원)로 영업이익률 21.4%를 기록하며 실적을 회복했습니다.

▲  2019년 반도체 업황 부진으로 인텔 낸드사업부는 부침을 겪었다. /자료=유진투자증권
▲ 2019년 반도체 업황 부진으로 인텔 낸드사업부는 부침을 겪었다. /자료=유진투자증권

▲  과점 체제의 낸드플래시는 수급 변화에 따라 ASP가 급변하는 경향을 보인다./자료=트랜드포스
▲ 과점 체제의 낸드플래시는 수급 변화에 따라 ASP가 급변하는 경향을 보인다./자료=트랜드포스

다만 시장은 지난 2~3분기처럼 낸드 시황이 유지될지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양강’으로 자리 잡은 디램과 다르게 낸드의 경우 여전히 5개 업체가 과점체제에서 가격 경쟁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트랜드포스(Trandforce)는 낸드 평균판매가격(ASP)이 지난 3분기부터 하락해 4분기에도 10~15% 하락할 것이라 예상한 상태입니다. 만약 다롄 공장에서 이익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는 곧 SK하이닉스의 재무 부담을 가중하는 요인이 됩니다.

안수진 나이스신평 선임연구원은 이에 대해 “이번 인수로 글로벌 낸드 시장이 5개사 과점체제로 전환돼 경쟁이 일부 완화될 수 있다”면서도 “인수합병, 구조조정 등을 통한 과점화가 보다 진전되기까지 공급과잉 수급구조가 해소되지 않으리라 전망된다”고 밝혔습니다.

▲  SK하이닉스 차입금은 2017년 4조1713억원에서 2020년 상반기 13조8557조원까지 늘었다./자료=사업보고서
▲ SK하이닉스 차입금은 2017년 4조1713억원에서 2020년 상반기 13조8557조원까지 늘었다./자료=사업보고서

또다른 우려는 SK하이닉스의 최근 차입금 증가 기조입니다. 2018년 5조2819억원의 차입금에 순차입금이 마이너스였던 SK하이닉스는 2019년 차입금이 11조7243억원으로 두 배 넘게 늘었습니다. 2019년 반도체 업황 악화에 사실상 무차입 기조가 무너진 겁니다. 지난 상반기에도 13조8557억원으로 2조원 넘게 차입금이 늘었습니다.

급격한 차입금 증가는 대규모 투자(CAPEX) 때문입니다. 2016년 6조2920억원이었던 투자집행 실적은 2017년 10조3360억원에 이어 2018년 17조380억원, 2019년 12조7470억원으로 급증했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모든 산업 가운데 사이클이 가장 빠릅니다. 개당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에 달하는 장비를 만들어도 2~3년 동안 써먹은 뒤 새로운 장비로 바꿔야 합니다. 최근 들어 반도체 기술이 7나노 이하 미세공정으로 넘어가면서 ‘머니게임’ 추세는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 /사진=SK하이닉스
▲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 /사진=SK하이닉스

내용을 종합하면, 나이스신용평가의 SK하이닉스 장기신용등급 전망 하향조정은 일견 타당해보입니다. 국내 M&A 역사상 최대 규모인 점, SK하이닉스의 최근 차입금 증가 기조와 맞물려있다는 점, 낸드 시황이 아주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점 등이 그 근거입니다. 다시 말해 혹시나 잘못될 경우 ‘승자의 저주’ 상황이 연출될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SK하이닉스는 자신감 넘쳐 보입니다. 이석희 사장은 컨퍼런스콜에서 “우리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결정을 했다”라며 “향후 5년 내 낸드 점유율을 인수 이전 대비 3배 이상 끌어올릴 것”이라 단언했습니다. 이 사장의 단언대로 SK하이닉스의 낸드 사업 인수는 과연 ‘신의 한 수’가 될까요. SK하이닉스가 낸드 시장을 평정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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