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전자가 '시그니처 올레드R', 일명 '롤러블TV' 체험 공간을 서울 강남 더콘란샵에 마련했다. (사진=이일호 기자)
▲ LG전자가 '시그니처 올레드R', 일명 '롤러블TV' 체험 공간을 서울 강남 더콘란샵에 마련했다. (사진=이일호 기자)

아이들에게 전화를 받을 때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자. 네모진 스마트폰을 귀에다 붙이듯 ‘여보세요?’라고 할 것이다. 사무실 곳곳에 보이는, 손에 잡고 숫자 버튼을 물리적으로 누르는 방식의 전화기는 옛날 물건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받는 방식도 구시대의 산물이라 불릴 날이 올 것이다.

▲  불과 1990년대까지 이런 TV를 봤고 이런 전화기를 썼다. (사진=픽사베이)
▲ 불과 1990년대까지 이런 TV를 봤고 이런 전화기를 썼다. (사진=픽사베이)

사람의 머릿속엔 도구를 대할 때 고정관념 같은 게 있다. 스마트폰은 네모 납작하고, 자동차는 밀짚모자처럼 가운데가 튀어나왔고, 마우스는 손에 감기는 반원 모양이고, 컵은 원통형에 속이 움푹 패어있고, 그런 것들이다. TV의 경우 1990년대까진 박스가, 액정디스플레이(LCD)가 등장한 2000년대부턴 네모 평판이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제품의 구조화된 형태를 바로 ‘폼팩터’(Form Factor)라 부른다. 폼팩터에 영향을 주는 핵심 요인은 사용자 경험이지만, 가전제품에선 안에 들어가는 부품의 영향도 적지 않다. 브라운관TV가 그렇게 크고 무거웠던 것도, LCD가 그렇게 얇아진 것도 모두 안에 들어가는 부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  LG전자가 CES2019에서 선보인 롤러블TV.(사진=LG디스플레이 블로그 디스퀘어)
▲ LG전자가 CES2019에서 선보인 롤러블TV.(사진=LG디스플레이 블로그 디스퀘어)

2019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박람회(CES)에서 새로운 폼팩터의 TV가 등장했다. 일명 ‘롤러블(Rollable) TV’로 불리는 ‘LG 시그니쳐 올레드 TV R’이다. 네모지게 긴 박스에서 TV 화면이 부드럽게 올라오는 모습은 수많은 관객의 찬사를 자아냈다.

대규모 행사장에서 몇 번 등장했던 이 제품이 1년 10개월여만에 정식 제품으로 출시됐다. 가격은 무려 ‘1억원’. LG전자에서 출시한 TV 가운데 가장 비싼 ‘LG 시그니처 8K 올레드 88형’이 5000만원대인데, 이보다 무려 두 배나 비싼 것이다. 롯데백화점 강남점 ‘더콘란샵’에 체험 공간이 마련돼 찾아가 봤다.

▲  LG 올레드R 화면이 올라오는 모습. (영상=이일호 기자)
▲ LG 올레드R 화면이 올라오는 모습. (영상=이일호 기자)

제품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TV를 쓰지 않을 땐 1.6미터 길이의 직육면체 박스 안에 들어가 있다가 전원을 켜면 뚜껑이 열리면서 화면이 스르륵 올라오는 방식이다. 제품 뒷면 양옆에 달린 막대 같은 부품은 TV 화면이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구동부 역할을 한다.

▲  (사진=이일호 기자)
▲ (사진=이일호 기자)

가까이에서 보니 화면이 그 자체로 통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1센티가 채 안 돼 보이는 기다란 막대들이 위아래로 촘촘히 박혀있는데, 이는 화면을 지탱하고 제품을 보호하면서, 말려들어갈 때 각도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관을 안내하시는 분께 여쭤보니 디스플레이가 최대 20도까지도 휠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접혔다’ 수준의 표현이 가능하지 싶다.

 

▲  LG 올레드R 후면 구동부 모습과 LG디스플레이 롤러블 OLED TV 특허 도면. (사진=이일호 기자, LG디스플레이 'OLED SPACE' 홈페이지 갈무리)
▲ LG 올레드R 후면 구동부 모습과 LG디스플레이 롤러블 OLED TV 특허 도면. (사진=이일호 기자, LG디스플레이 'OLED SPACE' 홈페이지 갈무리)

오늘날 평판 TV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요소가 바로 화면부다. 이 부분은 TV를 볼 때 꼭 필요한 파트이지만 안 쓸 때는 주변 인테리어를 제약하는 요소다. 물론 평상시 감상용으로 멋진 장면을 틀어놓는다면 좋겠지만, 전기료도 많이 나가고 무엇보다 비싼 TV의 수명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결국 디스플레이 파트는, 큰 사이즈 때문이라도 쓰지 않을 땐 눈에 안 보이는 게 더 바람직하다. TV를 벽에 매립한 뒤 여닫는다거나, 바닥이나 천정에서 튀어나오게 하는 등이 다양하겠지만, 그보단 제품이 ‘스스로 없어지는’ 쪽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플랙시블(Flexible)과 롤러블이 디스플레이의 새로운 폼팩터로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품의 경직성을 해소함으로써 숨기거나 몸에 감는 등의 행위가 가능해지며, 이는 그 자체로 사용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갖는 게 가능해진다.

▲  제품 측면 모습.(영상=이일호 기자)
▲ 제품 측면 모습.(영상=이일호 기자)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일단 어마무시한 가격대치고 65인치 사이즈로 화면 크기가 작다. 잠재 구매층이 될 ‘있으신’ 분들이 거실에 놓고 쓰기에 분명 작은 크기다. 물론 돈이 아주 많다면야 이런 고민은 애시당초 할 필요가 없긴 하겠다.

화질이 ‘8K’가 아닌 ‘4K’인 점도 단점으로 자주 거론된다. 8K TV의 해상도는 7680x4320로 4K(3840x2160)의 4배다. 물리적으로 4배 큰 화면에서도 같은 화질을 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같은 크기로 상정할 때 8K는 4K보다 더 뛰어난 화질을 낼 수 있다.

 

▲  LG 올레드R 스팩시트. 4K화질과 66인치 사이즈는 초프리미엄급 제품에 맞지 않는 부분으로 거론된다. (사진=이일호 기자)
▲ LG 올레드R 스팩시트. 4K화질과 66인치 사이즈는 초프리미엄급 제품에 맞지 않는 부분으로 거론된다. (사진=이일호 기자)

올레드R이 4K라는 건 ‘초프리미엄’치곤 다소 의외다. LG전자의 나노셀(NanoCell) TV나 삼성 QLED TV, 그 외 경쟁사 소니·파나소닉·TLC 등이 대형급이 모두 8K에서 화질 경쟁을 벌이는 것을 감안할 때 더 그렇다. 이 가격대에서도 원가 절감을 고민한 건지, 아니면 롤러블 단에서 화소를 끌어올리는 데 기술적 난제가 있는 건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무게와 부피도 눈에 확 들어온다. 스피커가 포함됐다지만, 91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게는 성인 남성 두 명이 들어도 이동이 쉽지 않다. 또 아무리 플랙서블이라 해도 탄성의 한계 때문에 부피가 상당하다. 화면이 들어간 ‘제로뷰’ 상태에서 높이 45.0센티, 측면 길이 26.6센티로 가로길이 자체가 길 수밖에 없는 걸 감안할 때 ‘크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  롤러블, 플랙서블은 향후 전자제품의 폼팩터 진화와 맞물려있다. (사진=LG디스플레이 블로그 갈무리)
▲ 롤러블, 플랙서블은 향후 전자제품의 폼팩터 진화와 맞물려있다. (사진=LG디스플레이 블로그 갈무리)

올레드R은 ‘1억원’이라는 제품 가격이 불편한 지점인 건 확실하다. 다만 ‘폼팩터 혁신’이라는 디스플레이 기술 변화를 대표하는 제품이 될 수 있다는 점, 또 어차피 대놓고 팔기 위해 만든 제품은 아니란 점에서 ‘상징적 가격’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향후 디스플레이 기술은 스트레처블(Stretchable) 등 프리폼으로 진보할 게 확실시된다. 아마 그때쯤 된다면, 과거 브라운관 TV가 LCD에 밀려난 것처럼 롤러블 TV가 평판 디스플레이를 대체할 시기가 오지 않을까. 롤러블TV 상용화를 그 자체로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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