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업계의 이슈메이커 ‘리브라 연합(Libra Association)’이 ‘디엠(Deim)’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고 1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아울러 경영진도 일부 보강한 디엠은 규제 준수 의지와 프로젝트의 독립성 확보를 강조하며, 스위스 통화감독청(FINMA)의 서비스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다. 업계는 ‘디엠 달러(가칭)’ 출시가 이르면 2021년 1월께 이뤄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처럼 정식 출범 이후 약 1년 6개월 만에 세상에 모습을 보이게 될 디엠. 당초 2020년 이내 서비스 출시를 약속했던 만큼 예상 기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으나, 숱한 논란 끝에 서비스 방향 전환 및 ‘개명’까지 선택한 디엠을 보면 ‘용두사미(龍頭蛇尾)’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말 그대로 시작은 장대했으나 끝은 평범해진 사례다. 이 프로젝트, 대체 어쩌다 ‘뱀의 꼬리’가 된 걸까?

▲  기존 리브라 스타일과 유사하게 철자만 변경된 '디엠' 로고
▲ 기존 리브라 스타일과 유사하게 철자만 변경된 '디엠' 로고

기반도, 명분도 충분했던 시작

2019년 6월 페이스북은 전세계 공용 가상자산(암호화폐)을 통해 ‘국경 없는 금융 사회’을 만들겠다며 리브라 연합을 출범시켰다. 당시 공개된 28개 기업 명단에는 페이스북, 비자, 마스터카드, 페이팔, 스포티파이, 우버, 이베이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들이 다수 포진돼 있었다. 그야말로 글로벌 네트워크, 결제, 유통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호화 파트너십이었다.

리브라(디엠)는 원래 전세계 화폐와 가치가 연동된 스테이블 코인이다. 스테이블 코인이란 단기 국채나 담보 등 준비금을 통해 실물 화폐와 가격을 연동한 가상자산인데, 코인 하나당 미국 1달러의 가치를 유지하는 ‘테더(USDT)’가 대표적이다.

반면 리브라 연합은 한발 더 나아가 달러, 유로, 엔화 등 세계 주요 통화들을 함께 묶어(바스켓) 리브라만으로 모든 결제 및 금융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도록 만들겠다는 포부를 세웠다.

아울러 리브라를 통해 은행 계좌가 없는 17억명의 사람들도 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구조적으로 송금과 결제 과정이 단순한 가상자산의 특성상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게다가 파트너 기업들이 보유한 수십억명 이상의 고객군을 대상으로 리브라가 유통된다면 그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  리브라 연합 출범 당시 함께한 28개 파트너 기업
▲ 리브라 연합 출범 당시 함께한 28개 파트너 기업

넘을 수 없는 규제의 벽을 만나다

이에 리브라 출범 전부터 경고의 목소리를 내오던 주요 국가에서는 즉각 서비스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당시 미 하원 금융위원회에선 “리브라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이 세계 금융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평가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개발을 일시 중단해야 한다 다는 서한을 연합에 보냈다. 주요 7개국(G7)에선 리브라 평가를 위한 TF가 구성됐으며 유럽에선 리브라 연합에 대한 반독점 조사가 시작하는 등 거센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세계 정부가 리브라를 반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만약 리브라가 달러를 넘는 새로운 기축 통화로 성장할 시, 은행의 기능과 통화 질서가 약화될 것에 대한 것에 대한 우려였고, 또 하나는 ‘페이스북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리브라 연합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페이스북은 이미 수차례 대규모 개인정보 관리 부실 사태를 겪으며 신뢰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만큼 결제와 관련된 민감 정보들까지 리브라 연합에 넘어갈 경우, 페이스북이 보유한 개인정보와 합쳐져 오남용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의심이었다.

물론 페이스북도 서비스용 지갑 개발 및 금융 데이터 관리를 따로 담당하는 자회사 ‘노비(Novi, 원래 이름은 칼리브라)’를 통해 데이터가 철저히 보호될 거라며 청문회에서 항변했으나 효과는 크지 않았다. 게다가 노비의 CEO는 페이스북의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인물이다.

▲  노비에서 개발 중인 디엠 지갑 서비스 데모 이미지 (자료=Novi)
▲ 노비에서 개발 중인 디엠 지갑 서비스 데모 이미지 (자료=Novi)

이어진 탈퇴 러쉬…엔진 잃은 리브라 연합

리브라를 둘러싼 각국 정부의 규제 요구와 압박이 수개월에 걸쳐 지속되자 결국 균열이 발생했다. 그 시작은 페이팔의 탈퇴다. 2019년 10월 리브라 연합 탈퇴 의사를 밝힌 페이팔은 “자사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고 금융 소외 계층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지만, 당시 업계에선 페이팔이 규제 당국의 압박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란 평가가 주를 이뤘다.

끝이 아니다. 곧이어 마스터카드, 비자, 이베이, 스트라이프, 메르카도 파고 등 리브라 주요 파트너들의 탈퇴 러시도 이어졌다. 사실상 리브라 결제·유통 생태계의 핵심을 담당하던 기업들이 대부분 이탈한 셈인데, 프로젝트 출범 후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리브라의 2020년 출시 계획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단일 통화 정책 포기, 타협 전략으로 전환

결국 사면초가에 놓인 리브라 연합이 선택한 건 타협이다. 2020년 4월 16일, 연합은 글로벌 단일 통화 개념에 대한 규제 및 당국의 우려를 고려해 리브라를 달러 등과 1:1로 고정된 여러 개의 스테이블 코인으로 나눠 출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의 단일 코인 리브라도 일부 유지하지만 실질적 기반은 개별 스테이블 코인에 둔다는 결정으로, 규제 당국의 승인을 얻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페이스북은 당시 수정된 리브라 백서에서 “처음부터 법정화폐와 경쟁하겠다는 의도는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써 리브라 연합의 단일 통화 생태계 실현 계획은 사실상 물 건너가게 된다. 파급력도 줄었다. 기존 스테이블 코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졌기 때문. 물론 페이스북과 자회사 왓츠앱, 인스타그램 등 글로벌 네트워크에 담긴 영향력은 여전히 작지 않지만 리브라를 더 이상 ‘용의 머리’로 볼 수 없게 된 시기였다.

이후 리브라 연합 상대적으로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당국 친화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미국 재무부 차관 출신을 신임 CEO로 선출하고 노비는 하와이 규제 샌드박스 통과 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또 11월 27일에는 미국 통화감독청(OCC) 소속 전 변호사가 리브라 연합의 법률 고문으로 영입됐으며 다음 날 <파이낸셜타임스>는 달러와 연동된 리브라 코인이 2020년 1월 공개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  디엠 이사회 명단 - 자포, 안드레센 호로위츠, 키바 마이크로 펀드의 주요 임원 등이 포진돼 있다 (자료=Diem)
▲ 디엠 이사회 명단 - 자포, 안드레센 호로위츠, 키바 마이크로 펀드의 주요 임원 등이 포진돼 있다 (자료=Diem)

디엠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까

이처럼 구체적인 출시 시기까지 언급된 상황에서 리브라 연합은 1일 ‘디엠’이란 이름으로 새 단장에 나섰다. 많은 논란을 거치며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된 리브라 브랜드를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의도다. 디엠(Diem)은 라틴어로 ‘날(Day)’이란 의미다. 스튜어트 레비 디엠 협회 CEO는 “프로젝트의 새로운 날”이란 함축적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업데이트된 디엠 2.0 백서에는 ‘페이스북이 연합 출범에 핵심적 역할을 했지만 더 이상 연합 내에서 특별한 권한을 갖지 않는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이 역시 규제 당국과 껄끄러운 관계인 페이스북의 존재감을 약화함으로써 프로젝트의 독립성을 강조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결과적으로 ‘리브라’는 실패했다. 아마 언젠간 제2의 리브라가 등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적어도 시대에 한참 앞선 시도였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이 “낡은 규제로 리브라 등의 스테이블 코인을 억압하기보단 금융 당국이 규제를 혁신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그 같은 전환은 아주 천천히 일어날 것이다.

곧 출시될 디엠의 경우 당분간 ‘플랫폼 코인’ 정도에 머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KB금융지주 연구소는 지난 7월 발표한 분석 보고서에서 “노비의 전자지갑이나 왓츠앱을 활용한 결제 기능을 고려할 때, 페이팔, 애플페이 등과 같은 간편결제 플랫폼과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디엠 연합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디엠 내에는 여전히 단일 통화 요소가 남아있는 만큼, 우선은 규제 당국 입맛에 맞춘 서비스로 사용자를 확보하고 추후 트렌드 변화에 따라 다시 한번 ‘리브라의 꿈’을 재현하려는 전략적 행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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