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한솔제지 로고.
▲ 한솔제지 로고.

한솔제지가 신사업 확장을 위해 호시탐탐 기업 인수 기회를 노리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난해 시장 매물로 나왔던 태림포장과 전주페이퍼에 공식적으로 아주 높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인수전 막판에 발을 빼긴 했지만 인수합병(M&A)에 대한 의지를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다. 올 초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이 신년사를 통해서도 신사업에 대한 계획 수립을 강조하기도 했으니까요.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한솔제지가 올해 M&A 시장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는 관측들이 많이 나왔는데요. 결과적으로 현재 올해가 다 지나간 시점까지 별다른 소식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다양한 것으로 보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에 적절한 매물이 나오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코로나19로 몸을 사리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올 초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팬데믹(Pandemic,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탓에 국내 많은 기업들이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한솔제지도 예외일 수는 없겠죠. 재무구조가 튼실하지도 않고 항상 현금을 적게 보유하고 있어 위기상황 대응력이 좋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을 바라보는 한솔제지의 시각은 다소 복합적일 것 같습니다. 호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악재이기도 한, 상당히 아이러니한 상황이기 때문이죠.

우선 영업실적은 작년보다 좋아졌습니다. 올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은 933억원으로 전년 동기 717억원보다 30%나 늘었습니다.

▲  한솔제지 실적추이.(출처=금융감독원.)
▲ 한솔제지 실적추이.(출처=금융감독원.)

팬데믹 상황에서 실적을 개선시킨 업종은 제한적입니다. 외부활동이 차단되고 재택근무 등 비대면 시대가 열리면서 IT, 게임, 이커머스 등의 업종이 큰 이득을 봤습니다.

제지업체 또한 코로나 수혜업종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온라인 쇼핑이 급증하며 포장 박스용 용지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입니다. 통계청의 온라인쇼핑동향 자료에 따르면 올해 온라인쇼핑 거래규모는 지난해와 비교해 크게 증가했습니다. 가장 최근 자료인 10월 동향만 보더라도 온라인 음식서비스 거래는 71.6% 늘었구요. 음식료품과 가전전자 및 통신기기는 각각 43.8%, 39.6%가 증가했습니다. 온라인쇼핑을 활성화하는 모바일쇼핑 또한 22.9% 성장했습니다.

▲  10월 온라인쇼핑 동향.(출처=통계청.)
▲ 10월 온라인쇼핑 동향.(출처=통계청.)

한솔제지의 실적을 ‘하드캐리’한 부문은 바로 ‘산업용지’ 부문입니다. 백판지는 골판지처럼 상자 제조에 쓰이는 백색인 종입니다. 치킨, 피자 등 배달박스를 비롯해 마트 내 다양한 진열상품의 포장 재료로 활용됩니다. 온라인쇼핑을 비롯해 배달과 택배가 늘어나며 백판지의 수요도 함께 늘어났습니다. 산업용지 부문의 영업이익률은 20%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팬데믹 탓에 다른 사업부문의 실적은 악화했습니다. 한솔제지는 사업용지 외에 인쇄용지와 특수지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요. 비대면 시대가 열리며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하다보니 인쇄용지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영수증, 라벨스티커 등의 특수지 수요도 함께 감소했구요. 두 사업부문은 3분기 적자 전환했습니다.

누적 기준이 아닌 3분기 실적만 보면 이러한 현상이 더욱 눈에 띕니다. 한솔제지의 3분기 영업이익은 190억원으로 전년 동기 290억원보다 무려 100억원이나 줄었습니다. 3분기 들어 두 사업부문의 업황이 더 나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업부문별 언밸런스한 이익기여도는 신사업을 부추기는 요소입니다. 인쇄용지처럼 일시적 현상에 따른 실적악화가 아닌 장기 업황침체인 경우 더욱 그렇죠. 산업용지 실적이 좋긴 하지만 전망이 좋지 않은 사업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죠. 좀 무리하더라도 빠르게 체질을 바꾸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조동길 회장이 신년사에서 신사업을 강조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한솔제지의 재무상태만 보면 기업 인수 등 과감한 신사업 투자가 수월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올 3분기 기준 보유현금은 78억원에 불과합니다. 남의 돈을 빌리지 않고서는 대규모 투자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죠.

▲  한솔제지 주요 재무지표 추이.(출처=금융감독원.)
▲ 한솔제지 주요 재무지표 추이.(출처=금융감독원.)

물론 최근 몇 년 간 재무구조가 개선된 것은 긍정적이긴 합니다. 2015년 한솔홀딩스로부터 물적분할했을 당시 부채비율은 300%가 넘었습니다. 이처럼 과도하게 높았던 부채비율을 일부 자산매각 등을 통해 올 3분기 160%대로 낮췄습니다. 한때 9000억원에 달했던 총차입금 규모도 7800억원으로 줄었구요.

한솔제지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아직 재무구조가 아주 우수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최근 몇 년 간의 개선활동을 통해 현재는 좋은 매물이 나오면 적극적으로 투자를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내년에 한솔제지가 눈에 띌 만한 신사업 계획을 내놓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코로나19 종식 시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구요. 그에 따라 어떤 영업실적을 내놓느냐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  한솔제지 지배구조 변화.(출처=나이스 신용평가.)
▲ 한솔제지 지배구조 변화.(출처=나이스 신용평가.)

또 최근 계열사인 한솔이엠이를 333억원에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시켰는데요. 한솔이엠이는 한솔제지 공장 유지보수를 주력으로 하는 회사로, 업무 시너지를 위한 결정이라지만 경영 상태가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이미 몇 년 전에 부분 자본잠식에 빠졌고 지난해엔 적자를 냈습니다. 도움을 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셈이죠.

한솔제지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변수가 많은 상황이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데요. 오히려 이런 변동성 심한 현 시기를 기회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습니다. 과연 앞으로 한솔제지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기대가 됩니다.

저작권자 © 블로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