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실리콘웍스가 LG그룹에서의 계열분리를 앞두고 있다. 사진은 손보익(왼쪽) 실리콘웍스 사장과 구본준 (주)LG 고문. (사진=(주)LG)
▲ 실리콘웍스가 LG그룹에서의 계열분리를 앞두고 있다. 사진은 손보익(왼쪽) 실리콘웍스 사장과 구본준 (주)LG 고문. (사진=(주)LG)

구본준 ㈜LG 고문의 계열 분리로 떨어져 나가는 회사 중에 실리콘웍스가 눈에 띕니다. IMF사태 때 LG가 반도체를 내준 이후, 실리콘웍스는 그룹 반도체 명맥을 잇던 유일한 회사였습니다. LG가 반도체를 쉽게 포기하긴 어렵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있었지만 결국 ‘뉴LG’에 탑승하게 됐습니다.

실리콘웍스는 최근 수년간 견고한 실적을 내왔지만 주식시장에선 줄곧 외면받던 종목이었습니다. 지난 8일 기준 종가는 5만800원인데, 지난 10년 새 최고가는 5만9500원(2017년 12월 1일), 최저가는 1만3850원(2011년 8월 12일)이었습니다. 주가 변동성 자체가 크지 않았을뿐더러 존재감도 적은 수준이었죠. 주가는 투자자의 기대 수익률에 대한 반영인데, 실리콘웍스는 이에 부응하지 못한 겁니다.

▲  실리콘웍스 주가 10년 시계열. 주가 변동성이 크지 않고 2014년 이후 거래량 자체도 줄어들었다. (사진=네이버 금융 갈무리)
▲ 실리콘웍스 주가 10년 시계열. 주가 변동성이 크지 않고 2014년 이후 거래량 자체도 줄어들었다. (사진=네이버 금융 갈무리)

LG그룹 내에서 실리콘웍스의 포지션은 사실 ‘캐시카우’라는 말이 적당해보입니다. 세부 재무지표를 봅시다. 2014년 이후로 매출이 매년 순성장했고 차입금도 거의 없는 사실상 무차입 경영 상태입니다. 부채비율도 30% 초반대로 우수하죠. 2015년 이후 순이익 500억원 안팎으로 적잖은 현금흐름이 계속 창출돼왔습니다. 그간 곳간에 쌓인 당좌자산만 4000억원에 달합니다.

실리콘웍스에서 좋은 숫자는 딱 여기까지입니다. 인수 후 매년 늘어나는 매출에 비해 매출원가와 판관비를 뺀 EBIT은 400~500억원대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매출은 늘어나는데 남는 건 별로 없게 되는 겁니다. 이에 매출 대비 EBIT 비율은 2015년 10.4%에서 지난해 말 5.5%까지 떨어졌죠. 4차 산업을 이끄는 반도체를 영위하는 기업으로 보기엔 다소 아쉽습니다.

사실 이런 행보는 2014년 LG가 실리콘웍스를 인수할 당시부터 의도적으로 택한 기조로 보입니다. 즉 고성능, 초집적 반도체가 아니더라도 중저가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 있는 아날로그 반도체 제품을 만들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죠.

실리콘웍스를 이끄는 손보익 사장은 2015년 LG전자 시스템반도체(SIC)센터장을 맡던 당시 한 세미나에서 “국내 팹리스들은 너무 고성능 시스템온칩(SoC) 분야에 집중돼있다”라며 “아날로그 반도체 분야에서도 많은 가능성이 있고 매그나칩이나 동부하이텍 같은 업체들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거 그의 말대로 실리콘웍스는 아날로그 반도체를 만드는 팹리스 회사 중에선 경쟁력 있는 곳이 됐습니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실리콘웍스는 2019년 기준 글로벌 반도체 업계 순위 60위 내에 속해있고, 특히 디스플레이 드라이버 칩(DDI) 시장에서 전체 3위까지 올라왔습니다.

다만 실리콘웍스 내에서 DDI를 빼면 사실상 남는 게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지난 3분기 기준 총 매출 가운데 DDI의 비중은 84.20%였고 티콘(T-CON), PMIC, 터치 컨트롤러 등 나머지는 15.80%에 불과했습니다.

비즈니스 포트폴리오 측면에선 비교적 소극적이었습니다. 팹 매물이 올라올 때마다 인수후보로 줄곧 거론됐지만 나서진 않았죠. 재정은 충분했지만 이 같은 면에서 별다른 시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수천억원의 돈을 쌓아놓고 필요한 R&D 투자만 단행한 건, 좋게 보면 선택과 집중일 테고 나쁘게 보면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물론 연내 실적은 좋습니다. 창사 이래 연 매출 1조원, 순이익 1000억원을 가뿐히 넘길 태세입니다. 이 실적이 유지된다면 지금 당장의 시가총액(8300억원)으로 본 기업 가치는 저렴해 보입니다. 증권가는 실리콘웍스 실적이 내년엔 더 늘어날 것이라 전망하죠.

다만 이 또한 고려해야 할 게 있습니다. 올해 실적 증가에 적잖게 기여한 게 바로 LG그룹 계열사, 특히 LG디스플레이라는 점입니다. 실리콘웍스는 LG디스플레이 DDI를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는데, 올해 LG디스플레이가 처음으로 아이폰12에 패널을 납품하면서 수혜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크게 두 가지 의문을 낳습니다. 우선 실리콘웍스 매출에서 LG디스플레이에 대한 높은 의존도입니다. 매년 개선되고 있다곤 하나, 지난 3분기 기준 실리콘웍스의 특수관계자 매출 의존도는 73.80%나 됩니다. 특수관계자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투자든 경영이든 리스크 요인입니다.

물론 중국향 매출 비중이 매년 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이 또한 지속가능하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최근 중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을 중심으로 DDI를 내재화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기업들이 경쟁력 있는 DDI를 내놓는다면 실리콘웍스는 대만은 물론 중국 업체들과도 점유율 다툼을 벌여야 할 겁니다.

또 LG디스플레이가 중장기적으로 지금처럼 OLED 경쟁력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을지도 다소 의문입니다.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에서 정부의 대규모 지원을 받은 업체들이 보다 싼 가격에 OLED 패널을 속속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올해 LG디스플레이가 틈입한 애플에 비록 리퍼비시 용이지만 중국 BOE도 납품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DDI 점유율 부동의 1위인 삼성전자는 삼성디스플레이를 통해 자사 제품을 세계적으로 납품하고 있지만, 설령 중국 경쟁사에 거래처를 빼앗기더라도 ‘갤럭시’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습니다. 반면 L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은 최근까지 그야말로 ‘죽 쓰는 수준’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혹여 LG디스플레이 OLED의 시장 점유율이 낮아진다면 실리콘웍스 또한 그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  실리콘웍스 DDI. 매출의 80% 이상이 DDI에서 발생한다. (사진=실리콘웍스 홈페이지)
▲ 실리콘웍스 DDI. 매출의 80% 이상이 DDI에서 발생한다. (사진=실리콘웍스 홈페이지)

당장 실적은 좋지만, 대만과 중국의 파상공세에 DDI의 수익성이 조금씩 훼손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실리콘웍스는 계열 분리라는 특별한 이벤트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부사장으로 지난 3년간 대표직을 맡았던 손보익 대표는 이번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했죠. 이는 결국 구본준 체제에서도 손보익 대표가 회사를 이끌 것이란 신호로 보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손 대표는 지난 몇년간 당장의 변화, 도전보단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회사를 이끌어왔습니다.

계열 분리 후 실리콘웍스는 과연 지금까지의 안정적 기조를 유지해갈까요. 아니면 그간 쌓아놓은 수천억원의 ‘실탄’과 우수한 재무건전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을까요. ‘뉴LG’가 탄생할 내년 5월을 기점으로 실리콘웍스에 변화의 바람이 불지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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