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신세계인터내셔날 로고.
▲ 신세계인터내셔날 로고.

네이버 검색창에 ‘신세계 정유경’이란 검색어를 입력해 지난 20년간 기사들을 쭉 살펴보니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은 그간 참 많은 ‘전쟁’을 치러왔던 것 같습니다. 실제 무력 충돌을 얘기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구요. 다른 재벌가 여성 경영인들과의 경쟁을 언론에서 눈에 띄게 표현하다 보니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사용됐습니다.

요새는 아주 익숙해졌지만 재벌가 여성이 경영에 직접 나서는 경우가 흔치 않은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LG, GS 등 일부 재벌가문들은 여전히 여성의 경영참여를 배제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당시 정 총괄사장을 비롯한 재벌가 여성들이 계열사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는 것만으로도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도 이해는 갑니다. 또 나이대도 대체로 비슷하고 호텔, 외식, 패션 등 업종도 겹쳐 자연스럽게 비교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요.

▲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출처=신세계)
▲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출처=신세계)

기사 검색 결과 ‘전쟁’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주 경쟁상대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장선윤 롯데호텔 전무였습니다. 당시 세 사람에게는 ‘재벌가 외손녀’라는 타이틀이 붙었습니다. 정 총괄사장과 이 사장은 각각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외손녀와 친손녀고요. 장 전무는 올 초 별세한 고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손녀입니다.

세 사람이 처음 격돌한 전쟁터는 ‘명품시장’이었습니다. 당시 포화 상태에 이른 백화점 시장에서 명품은 새로운 돌파구로 주목 받았습니다. 국민 소득수준이 꾸준히 향상되며 명품에 대한 소비욕구도 커지던 때였죠. 롯데, 신라, 신세계는 경쟁하듯 명품 매장을 신설하며 시장 선점에 나섰습니다.

당시 조선호텔 상무였던 정 총괄사장은 명품전쟁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미국의 첼시그룹과 합작해 고가 명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명품 아울렛 운영 법인 신세계첼시(현 신세계 사이먼)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앞서 분더샵(명품 편집매장)도 정 총괄사장이 주도해 성공적으로 안착시켰고요. 현재 코로나19로 인한 불황 속에서도 명품소비는 활발하다고 하는데요. 명품시장의 성장이 이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2010년대 초반에는 느닷없이 ‘빵 전쟁’도 펼쳐졌습니다. 롯데그룹의 장성윤 전무가 고급 베이커리 브랜드인 ‘포숑’을 인수해 공격적으로 시장확장에 나서면서 관심이 쏠렸습니다. 기존 사업자인 신세계와 호텔신라에 새롭게 대기업 플레이어가 경쟁에 참여한 것이었죠.

다만 ‘빵 전쟁’의 결말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당시부터 대기업들의 베이커리 사업 진출을 두고 ‘골목상권 침해’라는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돼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각에선 베이커리 사업 부당지원을 통해 오너일가가 사익을 챙긴다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죠. 실제 정 총괄사장은 부당지원 논란과 관련해 2012년 국회 국정감사 출석을 요청받기도 했는데요. 국정감사와 청문회 등 3차례 국회에 불출석해 검찰로부터 기소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론이 더욱 악화하자 결국 베이커리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 총괄사장은 2012년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베이커리 운영법인(신세계SVN) 지분 40%를 모두 매각했습니다. 신라호텔도 마찬가지로 베이커리 사업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사실 ‘빵 전쟁’은 사업적으로 보면 곁가지고요. 핵심은 ‘패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신세계는 이미 1996년부터 자회사 신세계인터내셔날을 통해 패션 브랜드 사업을 펼쳐왔습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갭, 디스퀘어드, 코치 등 유명 해외 브랜드를 국내 들여와 판매하는 사업을 해왔죠.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유통사업이지 패션사업이라고 보기엔 부족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실제 의류를 제조하고 브랜드를 런칭하는 형식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스튜디오 톰보이 로고.
▲ 스튜디오 톰보이 로고.

이 때문에 신세계인터내셔날이 2011년 국내 토종 브랜드 톰보이를 인수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자체적으로 브랜드 컨셉트를 기획하고 제품을 만드는 종합 패션기업으로서 발돋움하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또 동시에 톰보이 인수를 통해 이랜드, 제일모직(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LG패션(현 LF), 코오롱FnC와 본격 경쟁에 뛰어든 것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 총괄사장이 유럽 명품쇼를 직접 돌며 ‘열공’한다는 보도들이 많습니다.

정유경 총괄사장의 패션사업 확장은 당시 그룹의 지배구조 변화와 맞물려서도 상당히 중요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신세계그룹은 2011년 초 백화점 부문과 이마트 부문을 둘로 나누는 인적분할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추측만 무성하던 정유경 총괄사장과 정용진 부회장의 계열분리가 구체화된 때였죠. 정 총괄사장이 향후 신세계의 소유주가 될 것이란 아주 강력한 시그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신세계 주인이 힘을 주던 사업이 바로 패션사업이었고요.

패션전쟁은 현대백화점이 갑자기 치고 들어오며 확 불이 붙었습니다. 2012년 당시 국내 1위 여성복 업체였던 한섬 지분 34.6%를 4200억원에 사들였죠. 이를 통해 정유경 총괄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간의 경쟁구도가 형성됐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도 패션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을까요? 물론 경쟁은 치열하겠지만 전쟁이라 할 만큼 전력투구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오히려 대기업들은 현상 유지에 주력하며 새로운 먹거리 찾기에 혈안인 상황입니다.

오너일가들의 관심도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습니다. 과거 정 총괄사장과 자주 비교대상에 올랐던 이서현 이사장은 2018년 삼성물산 패션부문에서 삼성복지재단으로 자리를 옮기며 패션사업에서 손을 뗐습니다.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셈이죠. 이는 곧 패션시장은 더 이상 대기업들이 전쟁터로 삼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패션전쟁이 왜 예전 같지 않을까요. 그 이유로는 패션시장의 성장 한계가 꼽힙니다.

패션업계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패션사업이 화려하지만 돈이 아주 많이 남는 사업이 아니다”며 “소위 재미 보기가 어렵고 대기업들이 관심을 거둔 지 오래다”고 말했습니다.

▲  국내 패션시장 규모 성장 추이.(출처=KFI 리서치)
▲ 국내 패션시장 규모 성장 추이.(출처=KFI 리서치)

올해 코로나19로 실적악화가 심해지긴 했지만 국내 패션시장은 이미 성장 한계점에 다다른 상황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 한국선유산업연합회, 트랜드리서치가 공동 조사해 발표한 ‘코리아 패션 인덱스 리서치(KFI)’를 보면 국내 패션시장 규모는 2016년 성장이 멈췄습니다. 2017년에는 2010년대 들어 처음으로 역성장을 했고요. 2018년 반짝 회복했지만 2019년 다시 3.6% 후퇴하며 시장규모는 41조60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상황이 더 악화할 것으로 분석됩니다. 주요 패션업체들의 3분기 누적 실적을 보면 대부분 영업손익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세계인터내셔날도 상당히 고전하는 중인데요. 적자는 면했지만 영업손익이 75%나 감소했습니다.

▲  (출처=각사 사업보고서.)
▲ (출처=각사 사업보고서.)

게다가 영업실적 구성을 살펴보면 패션부문은 적자입니다. 화장품 사업에서 난 이익으로 간신히 흑자를 유지한 셈이죠. 올 3분기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코스메틱 부문에서는 231억원의 이익을 냈지만 패션 부문에서는 68억원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  신세계인터 사업부문별 실적추이.(출처=사업보고서.)
▲ 신세계인터 사업부문별 실적추이.(출처=사업보고서.)

특히 최근에는 패션사업의 한계를 상징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바로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폴 푸아레 프랑스 현지 법인을 청산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명품 브랜드를 직접 생산∙판매한다는 포부 아래 지난 2015년 폴 푸아레 상표권을 인수했습니다. 그동안 명품 브랜드를 수입만 해왔지만, 반대로 직접 생산해 해외 시장에 판매한다는 계획이었죠. 내수 기업의 한계를 깨고 시장을 넓혀 국제적인 업체로 발돋움할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법인 설립 이래 5년 연속 적자가 이어졌고요. 결국 올 3분기 현지에서 사업을 철수시켰습니다. 신세계그룹은 폴 푸아레 법인 청산 이유로 코로나19를 꼽았지만, 사실 코로나 이전에도 적자가 지속되는 등 영업상황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로나를 좋은 핑계삼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신세계푸아레 법인 실적 추이.(출처=신세계인터내셔날 분기보고서.)
▲ 신세계푸아레 법인 실적 추이.(출처=신세계인터내셔날 분기보고서.)

이제 언론에서는 더 이상 재벌가 외손녀들 간의 ‘전쟁’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외손녀라 칭하기에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여성’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 놓고 성과를 평가하는 것이 시대착오적 발상이기도 한 탓입니다.

무엇보다 어떤 특정 시장을 두고 ‘전쟁터’로 묘사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해졌습니다. 정 총괄사장만 보더라도 신세계에서 백화점, 면세점, 패션, 코스메틱 등 다양한 사업들을 모두 관리하고 있죠.

그렇다면 정 총괄사장의 전쟁터는 사라진 것일까요? 정 총괄사장의 새로운 전쟁터는 결국 해외시장이 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패션사업의 경우 폴 푸아레 실패로 아예 참전조차 허락되지 않았지만, 화장품 사업은 해외 시장에서 최근 좋은 실적을 내고 있습니다. 화장품 사업이 초창기 적자를 내며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정 총괄사장의 선구안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해외시장이라 하더라도 아직은 중국에 한정된 얘기이긴 합니다. 게다가 중국은 정치 리스크가 존재해 언제 어떻게 사업의 운명이 뒤바뀔지 알 수 없기도 하고요. 과연 정 총괄사장이 앞으로 내수기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지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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