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최근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전에 유진기업이 참가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업계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유진기업은 인수합병(M&A)으로 사세를 불려온 국내 대표 기업 중 하나로, 과감한 베팅과 전략으로 성공적으로 딜을 마무리한 경험이 많기 때문이죠. 유진기업의 이번 참전을 두고 ‘승부사가 돌아왔다’는 내용의 보도도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전의 승자는 현대중공업이 됐습니다. 유진기업은 본입찰에 참여하며 끝까지 경쟁을 펼쳤으나 막판에 고배를 마셨습니다.

유진기업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할 만한 자금여력이 충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체 재무여력은 상당히 부족했죠. 두산인프라코어의 매각 가격은 7000억~8000억원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올 3분기 별도기준 유진기업이 보유한 현금성자산은 약 500억원 수준에 불과합니다. 연결 기준으로 봐도 840억원 정도라 자체 보유 현금으로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차입을 늘리거나 재무적투자자(FI) 등을 끌어들이는 방법 말고는 없었는데요. 이미 재무부담이 상당해 FI와 손잡고 인수하는 방식이 가장 유력해보였습니다.

유진기업의 실패한 딜에 대한 전략을 분석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어떤 방식이든 유진기업으로선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하기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는데, 왜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두산인프라코어를 품으려 했나 그 이유가 궁금해 집니다.

유진기업은 그룹의 핵심 사업을 영위하는 동시에 지주사 역할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지배구조 정점에 있기 때문에 연결기준 실적에 그룹 전체 실적이 대부분 반영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  유진그룹 연결실적추이.(출처=한국기업평가.)
▲ 유진그룹 연결실적추이.(출처=한국기업평가.)

연결 기준으로 유진기업은 아주 꾸준한 성장을 해왔습니다. 2010년 1조5000억원 수준의 자산 규모는 10년 만인 2020년 3배가 넘는 4조5000억원 규모로 커졌습니다. 매출 역시 마찬가지로 2010년대 초반 7000억~8000억원 수준에서 머물렀으나 2016년 1조원을 돌파한 뒤로 단 한 번도 뒷걸음질 친 적이 없습니다. 2019년에는 1조460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영업이익은 2017년 이후 1000억원을 훌쩍 웃돌고 있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실적만 놓고 보면 굳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함께 상승하는 실적 그래프를 그려왔으니까요. 큰 위기에 봉착한 것도 아니고, 딱히 반전이 필요했던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죠.

▲  유진기업 주요 M&A.
▲ 유진기업 주요 M&A.

물론 꼭 실적이 좋다고 해서 M&A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반대로 이러한 M&A 본능이 지금의 성장을 이끌어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선제적으로 과감히 베팅해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사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죠.

다만 현재 상황에서 유진기업이 영위하고 있는 사업들의 성장 한계가 뚜렷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유진기업은 금융업을 제외하면 사실상 레미콘 사업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는데요. 국내 레미콘 사업 경쟁력은 탄탄한 편이지만, 전방 건설경기 침체로 업황 자체가 위축된 것이 문제로 꼽힙니다.

▲  유진그룹 연결실적추이.(출처=한국기업평가.)
▲ 유진그룹 연결실적추이.(출처=한국기업평가.)

특히 최근 들어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수익성 변화를 보기 위해 유진기업 별도 실적 추이를 살펴보겠습니다. 2011년 5700억원 수준이었던 유진기업의 별도기준 매출은 2019년 8000억원으로 꾸준히 성장을 했는데요. 영업이익은 매출과는 달리 들쭉날쭉한 실적을 기록했습니다. 가장 실적이 좋았던 사업연도는 76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던 2016년입니다. 이후부터 매출은 일정 규모를 유지하면서도 영업이익은 자꾸만 줄어드는 현상이 지속됐습니다. 이에 따라 2016년 10.7%에 달했던 영업이익률은 2020년 3분기 누적 기준 4.4%까지 떨어졌습니다. 수익성이 반토막 난 셈이죠.

레미콘 사업은 업종 특성 상 해외 진출도 어렵습니다. 레미콘은 ‘레디 믹스드 콘크리트(Ready Mixed Concrete)’의 약자로 공장에서 미리 설계된 배합비율에 따라 제조된 뒤 믹서트럭을 이용해 공사 현장까지 운반되는 콘크리트를 의미하는데요. 제조 후 최대 90분 내에 현장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사업 자체가 내수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  유진그룹 사업부문별 매출비중.(출처=유진그룹 홈페이지 갈무리.)
▲ 유진그룹 사업부문별 매출비중.(출처=유진그룹 홈페이지 갈무리.)

또 금융업도 사정은 다르지만 해외 진출이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죠. 언어, 문화, 법체계 등의 한계 때문에 우리나라 금융업체들은 내수시장 위주로 성장해왔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유진기업으로서는 두산인프라코어 인수가 더 절실했을 수 있습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건설기계를 주로 생산하고 있고, 주 무대도 국내가 아닌 해외라 시장 확장도 훨씬 유리하죠. 사업포트폴리오와 함께 시장 확장을 동시에 노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어쨌든 유진기업은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에 실패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유진기업이 노렸던 사업 및 시장 다각화 기회도 아쉽지만 놓쳤습니다. 2021년에는 기업들이 지난해 가득 끌어모은 현금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M&A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많이 나오는데요. 사상 최대 M&A장이 열릴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유진기업은 지난해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올해 M&A 귀재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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