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눈 먼 소녀의 일탈은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짓밟힌 민주주의의 굴레 속 서슬퍼런 칼날은 순진함을 악용해 들풀같이 피어오르는 민주주의를 학살했다. 한 순간에 밀고자가 된 어린 소녀는 홀로 남아 지난날을 후회해 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직감한다.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는 아픔만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레드 캔들 게임즈가 만든 게임 '반교: 디텐션'은 '대만 백색테러 시기'를 배경으로 한 2D 횡스크롤 워킹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게임이 흥행을 거둔 후 영화가 만들어졌고, 여세를 몰아 드라마로 제작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블로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에 이어 동명의 영화를 리뷰하며 '원 소스 멀티유즈(OSMU)' 모범 사례로 꼽히는 '반교: 디텐션'을 집중 분석했다. 이번 [콘텐츠뷰]에서는 OSMU 시리즈의 시초인 원작 게임에 대해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숨겨진 역사의 흔적들

반교 디텐션은 PC, 콘솔, 모바일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출시된 게임이다. 편의성을 위해 모바일 게임을 선택했다. 무료버전을 받은 이후 인앱 결제로 완전판을 구매해 본격적인 플레이에 돌입했다(내돈내산).

플레이 패턴은 단조롭다. 캐릭터를 좌우로 움직이고 단서 조각을 찾아 상황에 맞게 적용시키면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학교로 돌아가는 과정을 간략하게 담아낸 프롤로그에서만 '웨이충팅(위중정)'의 시점으로 플레이 하며 1~4장까지 '팡레이신(방예흔)'을 조작하는 방식이다.

▲  위중정과 방예흔의 운명적인 첫 만남.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 위중정과 방예흔의 운명적인 첫 만남.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조작이 단조로운 대신 단서 찾기와 미션 수행을 통해 서사에 접근하는 방식은 연결된 이야기를 감상하는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영화와 드라마로 스토리 라인을 파악해 놓았음에도 챕터별로 지나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같은 장소를 여러 번 오가며 플레이했다. 자칫 지나칠 수 있는 쪽지나 단서 하나에 다음 챕터로 갈 수 있는 결정적 힌트가 담겨 있다.

결정적인 장면은 거꾸로 매달린 위중정이다. 게임은 전체 줄거리를 흐뜨린 후 기억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서사에 집중한다. 제1장에서는 학교를 중심으로 흩어진 단서 조각을 모아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거꾸로 매달린 위중정의 목을 긋고 피를 그릇째 받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금서를 방예흔에게 전한 '원죄'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제1장으로 전환되면 방예흔으로 플레이 해 위중정의 목에 칼을 들이대야 한다.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 제1장으로 전환되면 방예흔으로 플레이 해 위중정의 목에 칼을 들이대야 한다.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피가 담긴 그릇을 3층 교실에 있는 책상에 부으면 자물쇠 비밀번호를 얻을 수 있는 힌트를 찾게 된다. 도자기 그릇 속 치아에 새겨진 6, 2, 3을 핏자국에 찍힌 팔괘에 대입해 자물쇠를 풀 수 있다. 자물쇠를 풀고 생활지도실로 향하면 다음 챕터를 위한 여정이 이어진다.

상징적인 물건을 찾아보는 것도 이 게임만의 특징이다. 공산당과의 중국 내전에서 패한 장제스와 국민당 일당이 대만 섬을 장악한 직후의 시대적 배경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게임에 등장하는 감옥에 '반공' 슬로건이 보이는가 하면, 단서에도 '공산주의자 색출' 같은 직설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학교 외부시설에 설치된 감옥에서 헝겊을 뒤집어 쓴 채 갇힌 수감자를 통해 당시의 고문이 자행됐음을 간접적으로 노출한다.

▲  제3장부터 라디오 주파수 변화에 따른 공간이동이 이뤄진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들은 실존하는 노래로, 대만 백색테러 당시 금지명령을 받은 곡이다.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 제3장부터 라디오 주파수 변화에 따른 공간이동이 이뤄진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들은 실존하는 노래로, 대만 백색테러 당시 금지명령을 받은 곡이다.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제3장과 4장을 플레이함에 있어 주요 매개체로 등장하는 '라디오'는 주파수에 따라 각기 다른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방예흔의 과거를 면밀히 알 수 있게 해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망춘풍', '사계홍', '월야추' 등 세 곡의 노래는 각각 '가정 불화', '아버지의 외도', '나만의 슬픔' 등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 노래들은 1930년대에 발표된 대만의 대중가요로, 관계자들이 일본 점령시기에 활동했다는 이유 때문에 금지곡이 됐다. 게임의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하면 금지곡을 라디오로 듣는다는 점에서 방예흔의 환상 속 세계를 대변하는 매개체로 활용되는 셈이다. 그만큼 방예흔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꿈으로 보여준 원죄의 무게

엔딩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야기의 큰 틀은 위중정의 꿈 속 세계이며, 이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방예흔이다. 개발진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교문 밖 마을로 이어지는 입구가 무너진 틈으로 흐르는 붉은색 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위중정은 붉은색 강물을 보고 '피'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앞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현실세계의 위중정이 사경을 헤메고 있음을 의미한다.

▲  위중정과 방예흔이 붉은색 강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피'를 암시하는 복선이 깔린다.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 위중정과 방예흔이 붉은색 강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피'를 암시하는 복선이 깔린다.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위중정의 꿈이라고 단정한 이유는 엔딩 때문이다. 유저의 게임 성과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데 진짜 엔딩에서 위중정은 살아 돌아온다. 게임 속 학교 옥상에서 간간히 등장했던 40대 아저씨의 정체가 위중정이었던 것. 그는 모진 고문 속에서 홀로 살아 남아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며 학교로 되돌아온다. 자신이 수업을 받았던 자리에 앉아 방예흔을 추억하며 미소짓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배드엔딩은 이와는 다른 결말을 보여주는데 후반부에 위중정이 등장하지 않는다. 방예흔은 모든 기억을 되찾지만 홀로 남아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위중정은 물론 연정을 품었던 장명휘도 감옥에 갇히게 되고 남은 것은 군부 통치 아래 '애국자'가 된 방예흔 뿐이었다. 학생들이 모두 모인 강당에서 진행된 상장 수여식이 일종의 '공개 처형'이 된 셈이다.

▲  배드 엔딩신을 장식하는 방예흔.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 배드 엔딩신을 장식하는 방예흔. (사진=반교: 디텐션 게임화면 갈무리)

사랑을 잃고 타인에게도 밀고자로 낙인찍혀 자신을 잃어가던 방예흔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한다. 잘못된 선택이 부른 파국이 윤회로도 이어지지 못한 채 기억을 잃고 망령이 되어 떠돌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원죄를 기억하라'는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반교 유니버스'의 서막

게임이 보여준 작품성은 영화와 드라마로 이어지며 강한 파급력을 보였다. 영화는 지난해 9월 대만에서 개봉한 후 일부 국가에서 상영되며 입소문을 탔다. 지난해 기준 142만달러(약 15억4200만원)의 수익을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영화는 게임 속 세계관을 그대로 재현한다. 방예흔이 들고 다니는 초의 경우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귀신을 피하는 아이템 '제삿밥'도 등장한다. 사슴목걸이, 인형, 올가미, 관리아저씨의 치아 등 게임에 등장한 아이템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위중정(왼쪽)이 방예흔의 영혼을 상상하며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사진=영화 '반교: 디텐션' 갈무리)
▲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위중정(왼쪽)이 방예흔의 영혼을 상상하며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사진=영화 '반교: 디텐션' 갈무리)

차별점은 이야기의 변주다. 영화는 게임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끝을 위중정의 시점으로 구성하는 대신 그의 서사 비중을 높였다. 방예흔이 장명휘의 부탁을 받고 위중정을 꿈 속 세계로 내보내는 장면도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작에서 산길에 상주하며 방예흔에게 충고하는 노파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편의 영화로 끝날 뻔한 '반교: 디텐션'의 이야기는 넷플릭스 드라마로 바톤을 터치했다. 지난해 12월 5일 공개된 동명의 드라마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190개국 시청자와 만났다. 원작의 30년 후를 다루지만 학교를 떠도는 '방예흔'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게임과 영화 팬들의 유입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임 DNA를 품고 영화와 드라마까지 확장한 '반교: 디텐션'. OSMU 콘텐츠가 연속성을 가질 수 있었던 근본적 배경에는 대만 역사의 아픈 희생자들을 기리며 그들을 추억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또 하나의 '반교: 디텐션'이 기대되는 이유다.

※대만 백색테러란?

1949년 국부천대부터 1987년 대만 계엄령 해제까지 이르는 국민당 독재 시기. 당시 국민당 정부는 1949년 5월 20일 오전 0시를 기해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선포 이후 내전 반대, 국공평화회담 주장, 평화건설, 민생 문제 개선, 민주화 등을 요구하면 공산당 간첩, 용공분자, 친일분자로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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