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프라코어가 중국 법인(DICC) 설립 과정에서 재무적 투자자(FI)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이유로 피소당한 소송에서 사실상 승소했다. 소송 금액은 지연 이자까지 합해 8000억원대로 점쳐졌다. 두산인프라코어가 가까스로 승소하면서 매각 협상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투자은행(IB) 업계는 법원 판결이 확정되면서 두산인프라코어와 FI 간 합의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  두산인프라코어 굴삭기.(사진=두산인프라코어)
▲ 두산인프라코어 굴삭기.(사진=두산인프라코어)

대법원은 14일 오딘2 등 투자자들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상대로 낸 매매대금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원심은 두산인프라코어가 투자자에게 소송금액 중 일부인 10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심이 인정한 청구금액은 7093억이지만, 원고가 명시한 금액이 100억원이어서 주문에는 100억원이라고 표기됐다.

이번 판결로 파기환송심 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하지만 대법원이 두산인프라코어에 주식 매매대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한 만큼 사실상 두산인프라코어의 승소로 소송이 끝날 전망이다.

대법원은 두산인프라코어가 투자자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음에도 동반매도요구권(드래그 얼롱)을 이행할 국속력은 없다고 판결했다. 드래그얼롱은 투자자가 자기 주식을 매도할 때 대주주 또는 다른 주주의 주식도 같은 조건으로 같이 매도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투자자가 엑싯(Exit)을 목적으로 대주주 지분을 동반 매각할 수 있기 때문에 발행회사에게 불리한 조항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2007년 두산밥캣 인수로 재무적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DICC를 설립했다. 무리하게 투자금을 모으려다 '자충수'를 뒀다.

▲  두산인프라코어 DICC 소송 일지.(자료=두산인프라코어 등)
▲ 두산인프라코어 DICC 소송 일지.(자료=두산인프라코어 등)

두산인프라코어와 FI 간의 분쟁은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FI는 2011년 DICC 지분 20%를 보유하는 조건으로 3800억원을 투자했다. 두산인프라코어와 FI는 DICC를 2014년까지 상장하기로 했고, FI는 투자금을 회수하기로 했다.

FI는 기간 내 상장이 안 될 경우 두산인프라코어가 보유한 DICC 지분(보유 지분 80%)까지 매각할 수 있는 드래그 얼롱 약정을 함께 걸었다. 투자자의 투하자본 회수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DICC의 상장은 이뤄지지 않았고, FI는 드래그얼롱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무산됐다.

FI는 2015년 DICC 지분 매각을 위해 투자소개서를 작성했고, 두산인프라코어에 자료를 요청했다. FI는 요청한 자료 중 일부만 받았고 지분 매각 절차는 중단됐다. FI는 두산인프라코어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해 주식 매매대금 지급 의무가 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두산인프라코어가 매매대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FI의 지분 20%(3800억원)에 내부수익률 15%를 복리로 반영해 7093억원을 지급하라는 취지로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뒤집혔다.

대법원은 두산인프라코어의 과실을 인정하면서도 주식 매매대금을 지급할 구속력은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원고(FI)에 투자소개서 작성 등 자료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 협조 의무를 위반한 원심 판단은 타당하다"며 "원고의 자료제공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 만으로는 신의성실에 반해 조건성취(지분 매각을)를 방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동반매도요구권 행사에 관한 계약 만으로는 DICC 지분을 매각할 당사자가 누구인지 매각금액이 얼마인지 특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두산인프라코어가 자료 제공 요청에 비협조적이었지만, 이를 토대로 지분매각을 방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두산인프라코어와 FI 간 계약내용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주식 매매대금을 변제할 의무가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계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당사자 사이에 중요 사항에 관해 구체적으로 의사의 합치가 있거나 적어도 구체적으로 특정할 기준과 방법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매매계약의 당사자인 매도인과 매수인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특정되어 있어야만 매매계약이 성립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드래그 얼롱을 행사할 경우 DICC의 경영권을 제 3자에게 매각하는 M&A와 유사해진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본 계약 체결에 이르기까지 절차가 매우 복잡해 불확실성을 갖게 된다"며 "두산인프라코어가 자료 제공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신의성실에 반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두산인프라코어의 논리를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 사실상 두산그룹의 승소로 끝났다는 평이다. 투자은행 업계는 두산인프라코어와 FI 간 합의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다.

대법원이 파기환송한 만큼 법적 다툼을 재차 진행하는데 수 년의 기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현대중공업그룹과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다. 양측은 이달 31일 본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DICC 소송과 관련한 매도자의 리스크가 사라진 만큼 FI들도 협상에 임하는 게 유리하다는 평이다. 두산인프라코어 매각이 임박한 상황을 레버리지로 삼아 최대한의 합의금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IB 관계자는 "현대중공업그룹이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에 대한 의지가 높은 만큼 이달 중 본계약 체결 가능성이 높다"며 "두산인프라코어와 FI 간 합의를 통해 이번 분쟁을 마무리하는 게 실익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판결은 시장에 적잖은 파장을 남길 전망이다. 두산인프라코어의 DICC 소송은 드래그얼롱과 관련해 법원에서 나온 첫번째 확정 판결이다. 1심 판결이 나온 이후 IB업계에서는 드래그얼롱 조항이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주주의 비협조로 지분 매각이 불발되는 걸 용인한다면 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은 투자자와 주주간 계약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조항의 해석에 관해 실무에 지침이 될 수 것"이라며 "'최대한 협조한다' 또는 '노력하여야 한다'고 기재된 경우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의무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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