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미국 반도체 매체 <SemiAccurate(SA)>는 인텔이 미국 텍사스 오스틴 소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14나노 그래픽카드(GPU)를 위탁 생산할 것이라 보도했다. 2021년 하반기부터 양산을 예상했으며, 규모는 300mm 웨이퍼 기준 약 1만5000장이 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300mm 웨이퍼 월 1만5000장은 연간 1조원 규모이며, 삼성전자 파운드리 연간 매출액이 약 16조원 수준이니 전체의 약 6.25% 수준으로 예상된다.


삼성-인텔 14나노 파운드리는 '오래된 소식'?

<SA>의 보도에서 전문가들은 선폭에 주목하고 있다. 인텔이 생산하고 있는 GPU 가운데 14나노 공정으로 만들어지는 제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김양재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 22일 낸 리포트에서 “관련 보도 내용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판단했다.

김양재 연구원은 “시장에서 기대하는 CPU 혹은 GPU 외주 시기는 빨라도 2022년 하반기 이후이며, 2021년 하반기부터 삼성전자 파운드리에서 양산 가능한 품목도 중앙처리장치(GPU)가 아니라 플랫폼 컨트롤러 허브(PCH)와 5G 시스템온칩(SoC)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PCH는 ‘칩셋’의 일종으로 컴퓨터 하드웨어 SATA와 IDE, USB 등 주로 저장장치를 컴퓨터에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다. 인텔은 최소 2018년부터 PCH를 파운드리에 맡겨 왔으며, 이를 삼성전자가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5G SoC의 경우 인텔은 지난해 초 ‘아톰(P5900)’이란 이름으로 10나노 공정의 제품을 출시했다. 업계에선 이 제품 또한 삼성전자 파운드리에서 양산된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이에 대해 김양재 연구원은 “TSMC는 2년전부터 인텔 GPU 관련 여러 개발 단계를 거쳤고, 인텔 제품 양산을 위해 기존 공정 일부를 변경했던 선례”가 있다며 “삼성전자 PCH와 5G 모뎀 역시 과거 2년 전부터 인텔과 개발 협력 중”이라 설명했다.

결국 삼성전자와 인텔의 14나노 파운드리는 기존 PCH나 5G SoC 협업을 뒤늦게 보도한 것이거나, 또는 양사 간 위탁생산 계약이 연장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만약 삼성전자가 진짜 인텔의 GPU를 만든다면...

그렇다면 <SA>의 보도를 단순히 ‘뒷북 뉴스’ 정도로만 치부해도 되는 걸까. 일부 내용에 있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최근 들어 삼성전자의 투자 관련 외신 보도들이 속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블룸버그통신>은 삼성전자가 100억 달러(약 11조 원)를 투자해 미국 텍사스에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2022년 시범운영, 2023년 가동을 목표로 이 공장에서 3㎚ 이하 칩을 생산할 계획이라는 게 그 내용이다.

하루 뒤인 지난 22일 <월스트리트저널>도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 애리조나 또는 뉴욕주에 170억 달러를 투입해 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 밝혔다. 공장 부지로 애리조나 주도인 피닉스, 텍사스 오스틴 인근 2곳, 뉴욕 서부 제네시 카운티의 산업단지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삼성전자 내부 관계자의 발언을 빌렸다.

두 보도의 투자 액수는 비교적 차이가 있지만, 삼성전자가 미국에 초미세 공정이 들어가는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지을 것이라는 건 기정사실로 보인다. 세계적인 반도체 설계 회사 대부분이 미국에 뿌리를 박고 있고, 이에 미국 내 팹이 있다는 것만으로 고객사와 더 유기적인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SA>의 보도에서, 만약 GPU를 만든다는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자. 당장 14나노, 11나노 공정의 오스틴 팹에서 최신형 GPU를 생산하기는 어렵겠지만, 향후 삼성전자가 미국 내 새롭게 지을 공장에서 인텔의 파운드리를 수주할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해 인텔이 독립 그래픽카드 시장에 새롭게 진출한 게 눈에 들어온다.

▲  인텔은 지난해 11월 노트북용외장 그래픽카드 아이리스Xe 맥스를 공개했다. 1999년 외장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철수한 지 21년만이다.
▲ 인텔은 지난해 11월 노트북용외장 그래픽카드 아이리스Xe 맥스를 공개했다. 1999년 외장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철수한 지 21년만이다.

인텔은 지난해 11월 노트북용 10나노 슈퍼핀 기반 독립 그래픽카드 ‘아이리스 Xe 맥스’를 출시했다. 1999년 외장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철수한 지 21년 만에 재진출이다. 외장 그래픽카드에서 경쟁력을 갖춘 AMD나 엔비디아에 맞서기 위해선 가격 경쟁력이 필요하다. 이에 TSMC보단 단가가 더 낮다고 알려진 삼성전자의 손을 잡는 쪽이 나을 수 있다.

인텔의 위기, 삼성전자에 '천재일우' 기회 될까

인텔이 당장 반도체 미세공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도 고려할 지점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인텔은 수년째 10나노 밑으로 CPU를 만드는 데 있어 상업화가 가능한 수준의 수율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최근 들어 10나노 공정의 수율이 개선되고 있다지만 차세대 7나노 공정 CPU는 2022년 하반기, 더 늦으면 2023년까지 연기한 상태다.

당초 업계 예상과는 다르게 인텔이 반도체 설계회사(팹리스)가 될 가능성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자체 생산을 줄이면서 TSMC나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 업체에 몇몇 반도체의 생산을 맡기는 ‘팹라이트’ 전략을 취할 전망이다. 인텔에게 필요한 것은 어려움에 빠진 팹을 안정화해 더 미세한 공정의 제품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엔비디아의 지포스 30 시리즈의 파운드리를 맡아 성공적으로 제품을 만들어냈다. 8나노 공정으로 만든 30 시리즈는 ‘가성비’를 앞세워 엔비디아의 역대급 GPU로 흥행에 성공했다. 엔비디아와의 협업으로 삼성전자의 GPU 생산 능력이 세계적으로 검증된 것이다. 올해에는  자체 생산한 5나노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엑시노스 2100'으로 시스템반도체 역량을 확실히 드러냈다.

▲  삼성전자는 갤럭시S21 시리즈에 탑재된 AP '엑시노스2100'으로 시스템반도체 기술력을 과시했다.(사진=삼성전자)
▲ 삼성전자는 갤럭시S21 시리즈에 탑재된 AP '엑시노스2100'으로 시스템반도체 기술력을 과시했다.(사진=삼성전자)

실제로 업계에선 인텔과 삼성전자가 GPU 파운드리 관련 논의를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고 있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삼성전자는 인텔의 위기를 발판 삼아 중장기적으로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인텔의 협업 소식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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