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시간이 다소 흐르긴 했지만 CJ그룹이 지난 4일 발표한 ‘2021 신년사’를 되짚어보겠습니다. 신년사는 기업들이 으레 형식적인 내용을 담아 공개하는 경우도 많지만, 실제 기업이 당면한 현재 상황과 미래 계획을 솔직하게 밝히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신년사를 작성한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코로나로 인한 반사 이익이 있기는 하였으나, 사회적 거리 두기에 직접적 영향을 받은 극장, 외식, 유통 등 그룹 사업 전반에 부진이 컸으며, 일부 계열사는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감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 “CJ그룹은 지난해 패러다임 시프트를 경영방침으로 정하였으나 코로나 확산과 이에 따른 위기 대응으로 제대로 된 실천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파괴적 혁신’으로 시장을 만들어 내는 기업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손 회장은 ‘파괴적 혁신’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혁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혁신’은 다른 대기업들의 신년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긴 하지만, 손 회장이 말한 ‘혁신’은 그 의미가 더 무거워 보입니다.

그동안 CJ그룹의 성장 원동력은 ‘혁신’이었습니다. CJ그룹이 범 삼성가(家) 소속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CJ그룹을 소유한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아버지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전 작고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과거 이 명예회장을 두고 ‘집안에서 쫓견나 사람’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두 그룹 간 사이가 좋지는 않았죠.

재계 관계자는 “CJ그룹은 태생부터 혁신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있었다”며 “분리 이후에도 삼성의 눈치를 보며 사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  이재현 CJ그룹 회장.(사진=CJ그룹)
▲ 이재현 CJ그룹 회장.(사진=CJ그룹)

실제로 CJ그룹의 주축 사업들을 살펴보면 모두 삼성이 손을 뻗지 않은 곳에 새로 진출해 일군것들이 많습니다.

삼성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한 1993년부터 CJ그룹은 매해 과감하게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대며 사세를 확장해나갔습니다. 1994년에는 외식사업(현 CJ푸드빌)과 단체급식사업(현 CJ프레시웨이)에 진출했고요. 1995년에는 정보시스템업(현 CJ올리브네트웍스), 종합건설업(현 CJ대한통운 건설부문), 영화사업(현 CJ ENM E&M부문)에 연달아 진출했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1996년 극장영상사업(현 CJ CGV) 진출, 1997년 빕스와 뚜레쥬르 런칭, 1998년 물류사업 진출, 1999년 올리브영 런칭 등 한 해도 허투루 보낸 적이 없습니다. 사실상 현재 CJ그룹의 주력 사업들은 전부 1990년대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 토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종종 이처럼 다양한 사업군 진출을 두고 ‘문어발 확장’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최소한 CJ그룹에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손대는 것들마다 모두 성공시키며 그룹 규모를 거대하게 키우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죠.

▲  (출처=금융감독원.)
▲ (출처=금융감독원.)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1997년말 기준 ㈜CJ의 연결기준 자산총액은 2조7000억원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2019년 기준 자산총액 규모는 약 40조원으로 20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회사 규모를 15배나 키운 것입니다. 같은 기간 매출액은 2조3000억원에서 33조8000억원으로 늘었고요. 영업이익은 2200억원에서 1조5000억원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CJ그룹이 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손 회장이 신년사에서 밝혔듯이 코로나로 인한 반사이익도 있지만, 일부 계열사들은 피해를 직격으로 입었죠. 이에 따라 CJ그룹의 성장과 이미지 개선에 기여했던 계열사들도 매각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끊임없이 사업을 확장해오던 CJ그룹이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사업구조를 뜯어고치려고 한 적은 없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 최근 몇 년 간 공격적인 투자로 재무구조가 악화된 것도 사업 매각의 이유 중 하나입니다. 2017년에는 브라질 농축대두단백 업체 셀렉타를 2200억원에 인수했고요. 2019년에는 미국 대형 냉동식품업체 슈완스를 무려 2조원이 넘는 금액에 사들였습니다. CJ그룹은 ‘파괴적 혁신’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인데요. 공개적으로 ‘디즈니’, ‘네슬레’, ‘DHL’을 롤모델로 세우고 있습니다.

우선 국내 영화관 시장을 주도했던 CJ CGV는 이미 해를 넘겨 계속 매각설이 나오고 있고요. 2019년 투썸플레이스 매각으로 몸집이 줄어든 CJ푸드빌은 아예 통매각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CJ제일제당이 사료사업을 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2020년까지 매출 100조원을 달성한다는 ‘그레이트 CJ’ 전략 얘기는 이미 쏙 들어간 지 오래입니다.

수익성이 악화된 사업을 매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입니다. 어떻게든 살리려고 더 큰 손실을 보는 것보다 빠른 결단을 내리는 것이 더 현명할 때가 많죠. 매각을 통해 확보한 금액으로 주력 사업을 밀어주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는 과거 CJ그룹의 성장을 주도했던 ‘혁신’의 성격과는 조금 다릅니다. 삼성의 모태기업 중 하나인 CJ제일제당은 요즘말로 전형적인 ‘게임 체인저’였습니다. 설탕 이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던 CJ제일제당은 ‘미풍’을 만들었으나 원조 강자인 ‘미원’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아류작에 불과했던 것이죠. 그러자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개념의 조미료인 ‘다시다’를 출시하며 시장 판도를 뒤엎었습니다. CJ그룹이 삼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후 각종 새로운 사업에 진출했던 것도 게임 체인저의 성격이 강했죠.

물론 이재현 회장 복귀 이후 CJ그룹은 글로벌 M&A에 힘을 쏟으며 계속해서 성장을 이어나가려고 하는데요. 코로나19로 인해 기존 전략의 수정도 불가피한 것은 물론이고, 온전히 사업에만 신경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  이선호 CJ제일제당 글로벌비즈니스 담당.
▲ 이선호 CJ제일제당 글로벌비즈니스 담당.

CJ그룹은 이 회장 개인 건강 문제 탓에 만일에 대비해 오래 전부터 승계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2014년 말 이 회장이 옥중에 있을 때부터 승계작업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과정에서 CJ그룹은 수차례 계열사의 분할 및 합병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그룹 측은 ‘사업 시너지를 고려한 결정’이라는 입장이지만, 만약 오로지 승계만을 위해 이러한 작업이 이뤄졌다면 실로 엄청난 에너지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회장의 장남인 이선호씨는 지난해 2월 정직 처분을 받은 이후 최근 CJ제일제당 내 글로벌비즈니스 담당으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씨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경영능력을 증명해 그룹을 물려받을 만한 자격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동시에, 지주사인 ㈜CJ 지분 취득을 위한 자금 마련 방법도 강구해야 합니다.

앞서 CJ그룹은 삼성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생존의 위기를 항상 옆에 두고 혁신을 해왔다고 했죠. 현재 코로나19로 일부 계열사들 실적이 크게 악화하긴 했지만, 과거와 같은 농도의 위기감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재계 13위의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했고, 더 이상 CJ의 영속성에 의심을 갖는 사람들은 없죠. 생존의 위기가 부재한 현 상황에서 CJ그룹은 과연 넥스트 ‘다시다 전략’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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