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생산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국으로 수입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수입 제한 기간은 무려 10년으로 사실상 미국 내에서 SK이노베이션의 생산활동을 전면 금지한 것이다.

시장의 관심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지에 쏠리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ITC의 최종판결은 효력을 잃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ITC의 판결을 승인할 경우 SK이노베이션은 LG에너지솔루션과 거액의 합의금을 주고 합의하거나, 미국 내에서 생산활동을 포기해야 한다. SK이노베이션은 사실상 '양자택일'만 남아 운신의 폭이 좁다.

업계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ITC 판결의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국제 무역질서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미국의 '이익'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  미국 대통령이 ITC의 최종판결 거부한 사례.(자료=산업통상자원부)
▲ 미국 대통령이 ITC의 최종판결 거부한 사례.(자료=산업통상자원부)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확률로 보면 SK이노베이션이 구제를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현재까지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의해 미국 ITC의 판결이 무력화된 사례는 6건 밖에 없다. 이중 5건은 1978년 지미 가터 행정부 때부터 1987년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이뤄졌다.

당시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전으로 국제 무역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던 시기인 만큼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유를 살펴보는 건 무의미하다.

나머지 1건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재임 중 이뤄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삼성전자가 애플을 ITC에 제소한 사건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삼성전자는 애플이 아이폰 4S와 아이패드에서 자사의 통신기술 표준특허 2건과 상용특허 2건을 침해했다며 ITC에 제소했다. ITC는 애플이 삼성의 특허 4건 중 1건을 침해했다며 애플 제품에 배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같은해 8월3일 USTR은 'FRAND 규정'에 따라 라이선스 협상을 거부하는 건 과도한 피해가 발생돼 예외적으로 금지명령을 인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FRAND 규정은 특정 상품을 생산할 때 반드시 필요한 특허에 대해서는 적정한 규모의 라이선스비를 받고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바마 행정부는 ITC 판결을 수용할 경우 애플 및 관련 업계에 피해가 발생할 것을 고려해 거부권을 발동했다.

필수적인 지적 재산에 대해서는 배타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미국 우선주의'를 우선한 것이다.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 간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는 어떨까. '미국 우선주의'를 고려하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셈법'은 복잡해진다. SK이노베이션은 현재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 2곳을 짓고 있다. 올해 완공이 완료되면 내년부터 배터리 양산에 들어간다. 2공장은 2023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장 2곳에서 연간 30만대의 전기차에 배터리를 납품할 수 있게 된다. 연간 생산능력(CAPA)은 21.5GWh이다. SK이노베이션의 글로벌 배터리 생산량 중 30.2%가 미국에서 생산된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현지 생산, 현지 납품 체계를 갖추기 위해 26억 달러(한화 3조160억원)를 투자했다. 약 2600개에 달하는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를 창출되는 효과도 있다. SK이노베이션 미국 법인(SK Battery America)은 올해까지 약 1000여명의 인력을 채용한다. 팻 윌슨 미국 조지아주 경제개발부 장관은 "SK이노베이션은 조지아주에 일자리가 가장 필요한 시기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했다"며 "(이번 투자가) 조지아주의 경제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됐다"고 강조했다.

현재 미국은 코로나19로 실업률이 치솟았다. 코로나19 팬데믹 발표 직후 실업률은 14.8%까지 치솟았고, 이후 점차 낮아져 6.3%까지 하락했다. 코로나19 여파로 20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상당수는 현재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출처: jlhervàs, flickr)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출처: jlhervàs, flickr)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바이 아메리칸'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이 행정명령은 '메이드 인 USA'가 깊게 반영돼 있다. 연방정부가 예산을 사용할 때 미국 노동자가 미국산 부품으로 만든 제품에만 납세자의 세금을 쓰도록 하는 계획이다. 바이든 신임 행정부는 미국 내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를 늘리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ITC의 이번 판결은 SK이노베이션의 미국 공장을 사실상 문닫게 하는 효과를 유발하는 만큼 조 바이든 행정부의 고민이 깊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판결을 승인할 경우 2600개의 제조업 일자리와 지역 경제 피해까지 감수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이 ITC 판결에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별도의 이유를 달지 않아도 된다. 미국 USTR이 거부권 행사 여부를 두고 대통령에게 권고하는 내용이 전부다.

2013년 애플과 삼성전자의 특허 침해 소송의 경우 'FRAND 규정'이 거부권을 행사하게 한 배경이었다. 당시 모바일 업체들은 스마트폰의 특허를 두고 분쟁이 잦았던 만큼 삼성전자의 배타적 권리를 인정할 경우 파장이 적지 않았다. 이번 건의 경우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 침해를 목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의 직원을 데려왔는지 여부가 관건이었고, ITC는 LG의 손을 들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짊어질 정치적 부담 또한 적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미국과 외국 기업의 분쟁인 경우 '자국 우선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지만, 이번 건의 경우 한국 기업 간 소송으로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핵심으로 두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생산과 기업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ITC의 최종판결이 효력을 얻을 경우 10년 동안 미국 내에서 배터리 생산이 불가능해진다. 배터리는 양·음극재와 분리막, 전해액 등 핵심 소재를 조립해 생산된다. 하지만 양극재와 음극재 등 핵심 원료는 각국에서 수입을 통해 조달해야 한다.

현재 원자재를 수입하지 않고 배터리를 생산하는 방법은 없다. 이번 판결은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내 수입 조치를 금지한 것으로 배터리를 생산하거나 수출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SCM(Supply Chain Management)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이번 판결을 우회할 방법은 없다.

▲  SK이노베이션 국내외 배터리 생산공장. 상기 캐파(GWh)는 현재와 다를 수 있음.(자료=SK이노베이션)
▲ SK이노베이션 국내외 배터리 생산공장. 상기 캐파(GWh)는 현재와 다를 수 있음.(자료=SK이노베이션)

2022년부터 SK이노베이션 미국 공장은 자사 생산량의 30%를 맡게 된다. 2023년 기준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캐파는 85GWh이다. 헝가리 3공장을 뺀 수치다. 이중 미국 공장 캐파는 21.5GWh이다. 헝가리 코마롱 공장 캐파는 16.5GWh이다. 2024년 3공장(30GWh)을 건설하면 캐파는 46.5GWh로 늘어난다. 중국 창저우 공장 캐파는 7.5Gwh인데, 옌청 공장은 20Gwh이다. 국내 서산 공장은 7.5GWh이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2020년 경영실적 발표회에서 배터리 수주 잔고는 70조원(550GWh)이라고 밝혔다. 2022년 배터리 부문의 매출은 5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ITC의 이번 판결로 SK이노베이션은 미국 내 배터리 생산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포드와 폭스바겐은 각각 4년, 2년씩 유예기간을 받았지만, 납품 계획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미국 공장은 21.5GWh의 캐파를 맡고 있는 만큼 '배터리 제국'을 목표로 한 그룹의 전략도 수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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