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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그룹이 애플과 자율주행 차량 공동개발 협상을 하지 않고 있다고 발표한 지 약 2주 지났습니다. 그 사이 현대차와의 추가적 협상 소식은 안 들리고 있고, 애플은 닛산과의 협상도 깨졌다고 하죠.

그런데 업계에선 현대차그룹과의 협상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차 공시 문구 자체로 협상이 깨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며, 이에 양측이 극단에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는 건데요. 현대차가 공동개발 부인 공시를 냈는데 무슨 말이냐고요? 같이 공시 내용을 보도록 하죠.

▲  현대차그룹 계열사는 지난 1월 8일 '자율주행 전기차 관련 공동개발 협력요청을 받고 있다'고 밝혔으나(왼쪽) 한 달 뒤인 지난 2월 8일 '애플과 자율주행차량 개발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공시 상 단어 변화(노란색)가 눈에 띈다. (사진=현대자동차 공시)
▲ 현대차그룹 계열사는 지난 1월 8일 '자율주행 전기차 관련 공동개발 협력요청을 받고 있다'고 밝혔으나(왼쪽) 한 달 뒤인 지난 2월 8일 '애플과 자율주행차량 개발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공시 상 단어 변화(노란색)가 눈에 띈다. (사진=현대자동차 공시)

지난 8일 현대차그룹이 낸 공시를 봅시다. ‘애플과의 자율주행차량 개발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는 건데요. 몇몇 사람들은 ‘문구’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애플과의 ‘자율주행차량’ 개발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잘 생각해봅시다. 지금까지의 보도들은 모두 두 회사가 ‘전기차’를 만들 것이라 했죠. 그런데 현대차는 ‘자율주행차량 개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현대차의 불과 한달 전 공시도 ‘자율주행 전기차’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단어를 자율주행차로 확 좁혀서 대응한 겁니다.

핵심 단어가 바뀐 건데,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현대차가 단어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을까요? 그렇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공시는 주주에게 회사의 주요 경영 사안을 밝히는 건데, 현대차 같은 대기업이 공시 속 문구를 별 생각 없이 정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공시를 뜯어봅시다. 그럼 몇 가지 해석이 더 가능합니다. 예컨대 자율주행차량에 대해 협의는 하고 있지 않지만, 전기차를 비롯한 미래차 협의는 할 수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자율주행차량은 전기차나 미래차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는 지금 당장은 협의하고 있지 않지만 기존에 협의했었다거나, 지금은 애플과 논의를 중단했지만 향후 협의를 재개할 수도 있다는 말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현대차그룹이 지난 8일 낸 공시는 그 문구상 굉장히 해석의 여지가 넓다는 겁니다.

▲  애플 아이카 상상도.
▲ 애플 아이카 상상도.

만약 두 회사의 전기차 관련 협의가 실제로 무산됐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경우 책임은 현대차에 실릴겁니다. 이유는 바로 애플의 ‘비밀유지약정(NDA · Non-disclosure agreement)’입니다.

현대차는 애플과의 협력설이 떠돌던 지난 1월, 공시에서 협업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한 달간 두 회사가 전기차를 어디서, 언제, 어떤 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국내외 보도가 그야말로 쏟아져 나왔죠.

애플은 ‘프로젝트 타이탄’이란 이름으로 전기차를 만들려 하고 있죠. 이에 하청 역할을 할 업 체를 물색하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애플과 협의 중인 업체 가운데 그만큼 보도들이 쏟아진 곳은 ‘현대차그룹’이 유일했죠. 양사의 딜브레이크 설이 나온 뒤에 주목받은 닛산도 애플-현대차그룹 때만큼 보도들이 많이 나오진 않았습니다. 업계에서 NDA 위반 가능성으로 애플이 딜을 끊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 여러 해석이 나오는데, 만약 실제로 애플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끊었다면 현대차의 향후 상황이 난처해질 수 있다는 말이 보입니다. 나중에 글로벌 기업들과 미래차 사업을 함께 하는 데 있어 현대차와 협상할 경우 부정적 이미지를 심었다는 거죠. 쉽게 말해 ‘현대차와 협상하면 말이 새 나갈 수 있다’는 나쁜 선례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  현대차그룹 E-GMP 뼈대 부분. (사진=현대차 HMG저널 홈페이지)
▲ 현대차그룹 E-GMP 뼈대 부분. (사진=현대차 HMG저널 홈페이지)

다만 현대차로서도 애플 측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몇 차례 보도가 나왔지만, 현대차·기아는 글로벌 자동차 판매량 순위 5위 안에 드는 굴지의 회사이며 단순한 ‘하청업체’가 아닙니다. 이는 내연기관차든 전기차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략을 들여다봅시다. 현대차는 2019년 말 전기차 분야에 향후 6년간 9조7000억원을 쏟아붓는 ‘2025 전략’을 공개합니다. 그 일환으로 현대차가 지난해 12월 공개한 게 바로 ‘E-GMP(‘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입니다.

E-GMP는 전기차 플랫폼입니다. 차를 만드는 게 아니라 차의 뼈대를 만드는 거죠. 뼈대 위에 어떤 차체가 얹히냐에 따라 차의 종류와 브랜드가 달라집니다. 현대·기아차 로고를 붙인 차도 만들고, 나아가 다른 회사의 차도 대신 만들 수 있습니다.

내연기관 시대는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였죠. 반대로 뼈대에 껍데기를 얹히는 전기차 시대엔 주문자가 원하는 대로 제품을 만드는 다품종 대량생산 시대로 돌입합니다. 현대차가 수십조원을 투자해 전기차 생태계를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현대차는 2월 23일 중 E-GMP 기반의 첫 전기차 아이오닉5를 세계 최초로 공개한다고 하죠. 이르면 3월부터는 본격 양산을 시작할 예정인 이 차에는 18분 이내에 80%까지 충전 가능한 초고속 충전, 국내 기준 500㎞에 달하는 주행거리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후 기아도 CV(프로젝트명)를 시작으로 E-GMP 기반 차량을 내놓을 전망입니다.

▲  현대차가 전기차 아이오닉5 티저 이미지를 공개했다.(사진=현대차)
▲ 현대차가 전기차 아이오닉5 티저 이미지를 공개했다.(사진=현대차)

다시 공시로 돌아가 봅시다. 현대차는 “다수의 기업으로부터 자율주행 전기차 관련 공동개발 협력요청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문구를 앞에 넣은 이유는 뭘까요.

현대차그룹은 800V 충전 시스템을 대량 생산한 첫 전기차 제조사입니다. 시장은 현대차가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플랫폼을 제공할 것이란 기대감을 보이고 있죠. 플랫폼 공개 1년도 안 돼 자사 전기차는 물론 로보택시도 준비하는 만큼 빠르게 저변을 넓힐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업계에선 현대차의 공시를 ‘협상력 강화’의 차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애플이 없어도 E-GMP의 큰 그림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지의 반영이란 겁니다.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애플과 자율주행차량 협의를 하지 않고 있다는 현대차 공시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기차 사업 가능성이 열려있는 답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E-GMP를 앞세운 현대차가 협상에서 우위에 서려는 태도도 읽힙니다. 애플과 현대차 이슈가 아예 소멸된 게 아닐 수 있는 만큼 두 회사가 깜짝 협상을 공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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