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왼쪽)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사진=각사)
▲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왼쪽)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사진=각사)

벤처 1세대인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를 서울상공회의소(이하 서울상의) 부회장단으로 이끈 원동력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 그들의 도전정신이 꼽힌다.

경제 5단체 중 한 곳인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는 각종 경제 현안과 사회 문제에 대해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정부나 국회를 향해 기업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낸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크다. 대한상의의 서울상의에 김 의장과 김 대표가 입성하게 된 것은 그만큼 그들이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으로 일궈낸 업적이 기존 경제계에서도 인정받은 결과로 풀이된다. 서울상의는 김 의장과 김 대표 등 7명의 IT·금융 기업의 수장들을 부회장으로 선임하며 상의가 제조업뿐만 아니라 IT를 비롯한 새로운 산업까지 포함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카카오를 설립한 김 의장은 한게임과 카카오라는 걸출한 기업을 잇달아 성공시킨 스타 창업가다. 그는 약 5년간의 삼성SDS 근무기간동안 PC통신 '유니텔'을 서비스하며 개발부터 사용자 응대까지 PC통신의 전반을 경험했다.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 회사를 박차고 나온 그는 우선 PC방을 운영했다. 게임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8년 11월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한 김 의장은 고스톱·포커·바둑 등의 온라인 게임을 선보였다. 각 PC방에 PC방 관리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컴퓨터의 바탕화면에 한게임의 아이콘을 띄우는 조건을 제시했다. 김 의장의 영업 방식은 시장에 통했고 한게임 회원 수는 증가했다. 하지만 무료 서비스로 출발한 한게임은 수익 모델이 없었다.

김 의장의 고민은 당시 삼성SDS에서 분사한 네이버컴과의 합병으로 이어졌다.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삼성SDS 사내벤처로 세운 네이버컴은 삼성SDS로부터 분사해 검색 서비스를 내놨지만 사용자 기반이 약했다. 하지만 든든한 모기업이 있어 자금력은 풍부했고 이는 한게임의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강점이었다. 반대로 한게임은 자사의 많은 회원을 네이버컴의 검색 서비스 이용자로 전이시킬 수 있는 강점을 지녔다. 양사의 합병 후 김 의장은 온라인 게임의 유료화라는 승부수를 띄웠고 이는 적중했다. 이후 회사는 게임과 검색 시장에서 성장을 거듭했고 사명도 NHN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2007년 9월 회사의 미국 사업을 총괄하던 김 의장은 회사를 떠난다고 발표했다. 회사가 커지며 관리자로서 해야 할 일이 늘었다. 이는 도전하기를 즐기고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김 의장에게 맞지 않는 역할이었다. 안정적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김 의장의 두번째 도전이었다.

그는 NHN을 떠나 인터넷에서 또 다른 도전을 하기 위해 카카오의 전신인 '아이위랩'을 설립했다. 미국에서 아이폰으로 인한 스마트폰 열풍을 지켜본 그는 모바일 시장에서 통할 아이템을 고민한 결과 커뮤니케이션이 핵심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기서 탄생한 서비스가 지금의 카카오톡이다. 카카오톡은 당시 경쟁자들보다 안정적인 메신저 서비스를 선보이며 이용자를 모았다. 또 게임 서비스를 도입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후 카카오톡은 쇼핑·콘텐츠·결제·송금 등의 서비스를 잇달아 추가하며 단순 메신저를 넘어 일상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카카오는 특히 코로나19 시대에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며 기업가치가 크게 성장해 코스피 시가총액 순위 9위까지 뛰어올랐다. 카카오는 개발자를 꿈꾸는 대학생들이 선망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모바일 시장에서 성공한 대표 벤처 기업이 카카오라면 게임 업계에는 김 대표의 엔씨소프트가 있다. 학창 시절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김 대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 진학 후에도 소프트웨어 연구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학교 내에서 유명한 컴퓨터 전문가가 됐다. 김 대표는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한 이찬진과 함께 워드프로세서 제작 작업을 한 이후 입사를 제안받았지만 교수의 꿈을 키우며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김 대표는 당시 현대전자의 영입 제안을 받고 산업기능요원으로 미국 연수를 떠나 현지에서 발전된 인터넷 기술을 목격하며 새로운 인터넷 세상이 열릴 것으로 직감했다. 하지만 김 대표가 당시 추진하던 인터넷 서비스 '아미넷' 사업이 중단됐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계열사간 줄다리기 때문에 하고 싶은 개발을 할 수 없게 되자 김 대표는 창업을 결심했다.

엔씨소프트는 대기업들의 인터넷 환경을 구축해주는 일을 주로 하며 성장했지만 김 대표는 자체 콘텐츠를 개발하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는 온라인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RPG(역할수행게임)를 개발하기로 했다. 한글과컴퓨터, 현대전자라는 안정적인 울타리에서 충분히 성장할 수 있었지만 자신만의 신념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도전에 나선 것이다. 당시 넥슨에서 온라인 게임 '바람의나라'를 만들었던 천재 개발자 송재경의 '리니지' 프로젝트가 중단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 대표는 그를 영입해 리니지 개발에 착수했다. 리니지를 완성한 김 대표는 전국의 PC방을 직접 뛰어다니며 게임을 도입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 대표의 노력 끝에 리니지는 2000년 동시 접속자 수 10만명의 벽을 돌파하며 성장 가도를 달렸다. 이후 엔씨소프트는 리니지2와 아이온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국내 대표 게임 기업으로 도약했다.

유년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김 대표는 2011년 프로야구 제 9구단 엔씨 다이노스도 창단했다. 이로써 엔씨소프트는 게임 외에 스포츠 콘텐츠도 제공하는 기업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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