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금융정보법(이하 특금법) 개정안이 25일부터 시행된 가운데, 법적 사업 신고 조건을 갖추지 못한 중소 가상자산(암호화폐) 거래소들이 '장기전' 돌입 의지를 드러냈다. 신고 유예 기한인 9월 24일까지는 사업 개편보다 신고 조건 충족에만 전념한다는 계획이다.

2019년 3월 국내 가상자산사업자(VASP)의 자금세탁방지 의무 강화를 골자로 개정된 특금법은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시행됐다. 이에 따라 국내에 사업 기반을 둔 VASP는 최장 6개월 이내에 사업 요건을 갖춰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해야 한다. 기한 내에 신고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불법 사업자로 간주돼 처벌받을 수 있다. 신고 대상은 '가상자산과 원화 간 거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로, 사실상 대부분의 가상자산 거래소가 해당된다.

▲ 국내 자금세탁방지제도 체계 (자료=FIU)
▲ 국내 자금세탁방지제도 체계 (자료=FIU)

주요 신고 조건으로는 △ISMS(정보보호관리체계) 인증 획득 △은행의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이하 실명 계좌) 확보 △AML(자금세탁방지) 시스템 구축 등이 있다. 현재 국내에서 사업 중인 가상자산 거래소는 100여곳이다.

하지만 이들 중 ISMS 인증 획득을 완료한 거래소는 현재까지 15개(△빗썸 △업비트 △코인원 △코빗 △고팍스 △한빗코 △캐셔레스트 △텐앤텐 △지닥 △플라이빗 △에이프로빗 △후오비코리아 △코인엔코인 △프로비트 △비둘기 지갑)에 불과하다. 포블게이트 등 인증 절차를 밟고 있는 거래소들도 있다.

이 중 실명 계좌까지 확보한 거래소만 본다면 신고 조건을 충족한 곳은 단 4개(빗썸, 업비트, 코인원, 코빗, 이하 4대 거래소)로 줄어든다. 이들은 특금법 개정 이전에도 은행과 실명 계좌 제공 계약을 체결해 운영했던 거래소다. 결국 이들을 제외한 90개 이상의 거래소가 신고 조건 불충족 대상에 포함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중소 거래소 입장에서 가장 큰 난관은 실명 계좌 확보다. ISMS와 AML은 인증 획득과 구축에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소모될 뿐 자금력과 기술력만 갖추면 누구든 달성할 수 있는 조건이다. 반면, 실명 계좌 확보를 위해선 은행과 거래소가 일대일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은행은 거래소의 준비 상황 및 평판 등을 고려해 계좌 발급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민간 사업자인 은행이 또 다른 민간 사업자인 거래소의 숨통을 쥐게 된 형국이다.

하지만 실명 계좌 발급에 망설이는 은행들이 마냥 '갑질'을 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현재 국내에서 가상자산과 이를 취급하는 거래소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가 낮은 상황에서 계약한 거래소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이는 자칫 은행의 평판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은행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검증된 4대 거래소 외 다른 거래소와의 계약을 망설이는 이유다. 은행이 직접 거래소를 평가하도록 한 조항에 대해서는 특금법 개정안 시행령 발표 이전까지도 업계의 보완 요구가 빗발쳤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비트코인 등 주요 가상자산 콘셉트 이미지 (사진=Pixabay)
▲ 비트코인 등 주요 가상자산 콘셉트 이미지 (사진=Pixabay)

결국 법 시행일까지 실명 계좌를 확보하지 못한 거래소들은 남은 6개월 동안 실명 계좌 확보 등 조건 달성을 위한 총력전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에이프로빗 관계자는 "거래소 출범 당시부터 VASP 자격 획득을 염두에 두고 설립된 만큼, 조건 달성 여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사업 개편보다 서비스 확장 및 고도화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플라이빗 관계자도 "당장은 모든 임직원이 실명 계좌 확보에 집중하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고팍스는 "4곳의 은행과 긍정적인 대화를 진행 중"이라며 "실명 계좌 확보를 자신하고 있는 만큼 사업 개편은 논외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후오비 코리아의 경우 26일 특금법 대비 시스템 고도화를 위한 개발자 채용 공고를 내며 숨 고르기에 나섰다.

은행권도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이다. 만일 이대로 상당수 거래소가 폐업하게 될 경우 은행들 역시 거래소 이용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실명 계좌 발급을 위한 공동평가 지침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구체적인 평가안이 마련될 경우 중소 거래소들의 실명 계좌 획득 가능 여부도 한층 명확해질 전망이다.

한편, 업계에선 지금보다 더 많은 거래소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특금법을 통해 운영이 투명하지 않았던 부실 거래소들이 정리된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4대 거래소만 남을 경우 시장 경쟁이 저해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소 10개의 거래소가 사업 승인을 받아야 바람직한 경쟁이 이뤄질 것"이라며 "사업 신고에 실패한 거래소가 해외로 나갈 경우 그들이 낼 세금이 국외로 흘러가게 되는 점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올해 특금법 신고 및 사업 승인을 받는 거래소 명단은 연말 무렵 최종 확정된다. FIU는 9월 24일까지 신고한 사업자를 대상으로 최장 3개월 이내에 승인 여부를 통지한다는 계획이다. 이론상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12월 24일) 전날이 마지노선이다. 또한 이후 사업 승인을 받지 못한 거래소의 경우 폐업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이용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거래소의 사업 신고 현황을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은행과 달리 거래소 폐업 시 발생하는 금전적 피해에 대해선 정부가 보증하지 않는다.

이건한 기자 sugyo@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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