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한미 FTA 체결 당시 사진. 오른쪽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현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사진=외교통상부)
▲ 2007년 한미 FTA 체결 당시 사진. 오른쪽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현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사진=외교통상부)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분쟁이 생겼을 때 투자를 유치한 국가의 법원이 아주 공정하게 재판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이를 100% 확신할 수 없다."

김종훈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은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재임 중이던 2007년 삼성경제연구소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한EU FTA 등 다수의 FTA를 체결했다. 그가 연구소 인터뷰 중 한 말은 'ISD 조항(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 investor state dispute)'을 겨냥한 것이다.

ISD 조항은 해외투자자가 상대국의 법제도로 피해를 입었을 경우 국제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도록 한 제도다. 이 조항은 한미 FTA 당시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혔다.

당시 한국은 '정부의 동의없이는 외국인 투자자가 정부를 국제 중재에 회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런데 FTA 체결로 이 조항이 도입됐고, 외국인 투자자의 필요에 따라 소송을 통해 공공정책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진보진영과 시민단체는 ISD 조항이 경제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반발했다. 김 의장은 통상교섭본부 내 '매파(대외 강경론자)'로 ISD 조항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결국 FTA에 담기게 됐다.

그는 ISD 조항이 외국인 투자를 확대하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ISD 등으로 투자 절차가 정교하게 돼 있어 보다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 중재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투자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김 의장은 10여년 후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의장은 지난달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는 내용의 판결이 있은지 한달 여 후 미국 워싱턴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미국 행정부 관계자와 조지아주 상원의원을 만나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주문했다. 거부권을 통해 ITC 판결의 효력을 중지해달라는 주문이다.

김 의장은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ITC가 수입금지 명령을 뒤집지 않으면 (조지아주는) 수조원의 투자 유치 기회를 잃을 것"이라며 "ITC 판결이 유지된다면 우리는 다른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 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거 '외국인 투자자 간 분쟁이 생겼을 경우 국제 중재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 그가 SK이노베이션 이사회에서는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중재 기구인 ITC의 판결도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효력을 상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제 중재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그의 주장과 비교하면 모순된다.

▲ 김종훈 의장 과거 통상교섭본부장 시절과 현재 발언 비교.(자료=언론 등) 
▲ 김종훈 의장 과거 통상교섭본부장 시절과 현재 발언 비교.(자료=언론 등) 

김종훈 의장 10년 전 "협상을 할 때는 상대와의 신뢰를 쌓아가는 게 중요"

김 의장의 최근 발언은 통상교섭본부장 시절의 발언과 사뭇 다르다. 김 의장은 당시 삼성경제연구소와 인터뷰를 통해 "협상을 할 때는 상대와의 신뢰를 쌓아 가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며 "협상은 상대의 경제적 이익과 우리의 경제적 이익을 절충하는 것이고, 협상의 결과는 '기브 앤 테이크'가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타협을 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걸 박수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대편의 이익과 나의 이익을 서로 확대하고자 하는 협상에서는 서로 '윈윈'이 될 수 있도록 절충해야 한다"며 "사업이나 경제에 있어서는 협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11일 SK이노베이션 이사회는 "미국에서 배터리 사업을 지속할 의미가 없거나 사업 경쟁력을 현격히 낮추는 수준의 요구 조건은 수용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입장을 밝혔다.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이 구상하는 합의금은 조 단위가 차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은 수천억원을, LG에너지솔루션은 수조원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SK이노베이션 이사회은 "수용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입장을 밝히면서 양측의 입장차를 재확인했고, LG에너지솔루션은 "가해자 입장에서 무리한 요구라 수용불가라고 언급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맞섰다. 업계는 "양측이 협상을 통해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해결할 의지가 없음을 사실상 확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김 의장이 통상교섭본부장 시절 강조한 '윈윈의 원칙'과도 배치된다.

전지업계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은 LG에너지솔루션과 협상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이는 협상 중에 상호 신뢰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백악관 넘나드는 김종훈 의장, 이사회 '월권 행위?'

김종훈 의장은 지난달 미국 행정부와 의회의 주요 인사를 만나 거부권 행사의 필요성을 읍소했다. 김 의장의 이 같은 행동이 이사회의 권한을 뛰어넘는 월권 행위라는 우려도 적잖다.

이사회(Board of Directors)는 주식회사의 기관으로서 회사의 업무집행에 관한 의사 결정과 이사의 직무집행을 감독할 권한을 갖는다. 이사회 역할은 기업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경영진을 감독하는 것이다.

SK그룹의 지주사인 ㈜SK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사회 권한은 △주주총회와 이사회, 기타 경영지배구조 관련 사항 △투자 및 기획관리 사항 △회계 및 재무관리 사항 △인력 및 조직관리 사항 △기타 주요 경영사항으로 명시돼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이사회 권한은 △주주총회, 이사회 및 기타 경영지배구조 △투자 및 기획 △회계 및 재무 △인력 및 조직 △기타 주요 경영사항으로 정해져 있다. 김 의장이 미국 행정부의 주요 관계자들을 만나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는 건 이사회 권한 밖이라는 의견도 있다.

통상 기업 내에서 정부와 국회, 이해관계자를 만나 기업의 입장을 피력하는 업무는 '대관 업무'에 속해 있다.

기업의 사업영역이 확대되고, ESG 경영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사외이사 중에서도 대관 업무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다. 쿠팡은 지난해 10월 경제학자이자 금융 전문가인 케빈 워시 전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이사를 쿠팡의 새 이사회 멤버로 합류시켰다. 나스닥 상장을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그럼에도 사외이사가 공개적으로 자신이 속한 기업의 입장을 피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김 의장은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공개 행보를 통해 SK이노베이션의 입장을 전달했다. 그는 2006년 한미 FTA 한국 측 대표를 맡았고, 당시 협상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 내 인맥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전문성과 인맥에도 사외이사가 공개적으로 대관 업무를 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사외이사의 전문성을 대관 영역에 활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김종훈 의장은 공개적인 행보를 통해 SK이노베이션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알렸다"며 "기업 이사회 의장이 공개적으로 대관 업무를 하는 건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 최태원 SK그룹 회장.(사진=SK)
▲ 최태원 SK그룹 회장.(사진=SK)
SK그룹은 2004년 외국계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에서 경영권 공격을 받으면서 국내 대기업 중 선진 구조의 이사회를 구축한 그룹으로 유명하다. 사외이사 비율을 사내이사보다 많게 구성하고, 투명거래위원회 등 세부 위원회를 설치해 경영진 감독 역할을 강화했다. 2019년 그룹 지주사인 ㈜SK는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직을 분리했다. 최태원 그룹 회장이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재계에서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모범사례로 평가했다.

그런데 김종훈 이사회 의장이 경쟁사인 LG에너지솔루션과의 분쟁에서 자사의 입장을 투자국의 행정부에 읍소하고 나서면서 그룹의 '이사회 중심 경영'에 오점을 남겼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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