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사진=픽사베이)
▲ (사진=픽사베이)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계 세계 1위 TSMC가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도체 공장이 아니라 ‘물 공장’입니다. 대만 남부에 산업폐수를 용수로 재활용하는 설비를 짓는 겁니다.

산업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반도체 산업에서 ‘물’은 핵심 자원입니다. 웨이퍼의 재료가 되는 실리콘은 없더라도 어떻게든 다른 소재로 대체할 수 있고 대체물질이 연구되고 있지만, 물은 없으면 제품을 아예 만들 수 없습니다. 반도체 공정에 다량의 화학 성분이 들어가는데 이를 씻어내는 과정에서 물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 (자료=대만 교통부 중앙기상국, 코트라)
▲ (자료=대만 교통부 중앙기상국, 코트라)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대만의 물 부족 상황을 먼저 정리해봅시다. 대만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 8월(강수량 322.5mm)을 제외하면 6~9월 강수량은 100mm 안팎이었고 10월과 11월은 20mm 수준에 그쳤습니다. <뉴욕타임즈(NYT)>에 따르면 대만의 이런 가뭄은 1964년 이후 처음이었다죠.

이런 상황은 올해도 ‘진행형’입니다. 대만 중앙기상청에 따르면 1~4월 총 강수량은 165.5mm로 지난해 3월 한 달간의 강수량(245.5mm)에도 한참 못 미칩니다. 대만의 우기는 4월부터 시작되는데 올해 4월엔 지난 1일부터 25일까지 강수량이 단 0.5mm에 불과합니다. 또 여름이 되더라도 지난해와 같은 가뭄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죠.

▲ 대만 저수지 담수 현황. (이미지=water.taiwanstat.com)
▲ 대만 저수지 담수 현황. (이미지=water.taiwanstat.com)

식수와 생활용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가 부족해졌습니다. 대만 저수 현황 자료를 보면 대만 저수지 21곳 가운데 무려 11곳의 저수량이 20% 아래로 내려간 상황입니다. 절반 이하로 내려간 곳까지 합치면 18곳에 달하고요. 물 부족은 특히 중부지역과 남부지역에 집중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 부족 상황이 심각해지자 대만 정부는 기업의 산업용수 공급을 줄이는 한편 농업용수로 쓰던 물도 반도체 공장으로 공급한다고 합니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위한 선택인데, 이에 대만 관개지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농지에 물 공급이 끊겼습니다. 살갗을 드러낸 대만 농지의 메마른 사진들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게 합니다.

▲ (사진=‘대만 가뭄’ 키워드 유튜브 화면 갈무리)
▲ (사진=‘대만 가뭄’ 키워드 유튜브 화면 갈무리)

대만의 물 부족 문제는 대만뿐 아니라 글로벌 산업계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슈입니다. 전 세계 위탁생산 반도체의 63%를 TSMC와 UMC 두 곳에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드는 반도체는 오늘날 전자제품 대부분에 들어가지 않는 데가 없죠.

두 회사는 물을 얼마나 쓸까요. 각사 ESG 관련 자료에 따르면 2019년 TSMC는 5690만 톤의 물을 사용(대만 생산공장 기준)했고 UMC는 1883만 톤(싱가포르·중국 공장 포함)을 썼습니다. 당장 대만 반도체 업계에 공장 가동에 차질이 생기진 않고 있지만, 상황이 장기간 이어진다면 이들에게 위험 요인이 될 게 분명합니다.

두 회사의 물 저감 노력도 상당합니다. 취수처를 다변화하고, 공정 과정에서 물 사용을 최소화하며, 공정 과정에서의 물 배출 손실을 줄이고, 공정에서 쓴 물은 정수해 재사용합니다. 이를 통해 TSMC와 UMC는 각각 328만 톤과 199만 톤의 물을 아꼈다고 밝혔습니다. 절대적인 양도 많지만, 이들이 쓰는 물의 양 대비로도 5~10% 수준이니 적지 않은 규모입니다.

TSMC가 지난해부터 대만 남부지역에 자국 내 첫 민영 재생수 공장을 짓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TSMC는 2016년 재생수 기술을 개발했고 2021년 완공 예정인 이 공장을 통해 2025년 2만 톤의 재생수를 취수할 계획입니다. 물 공급 문제가 심각해진 지난 3월엔 공장 외 지역에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물탱크 트럭을 100대 빌리는 계약도 했다 하죠. 이들 트럭이 대당 옮길 수 있는 물의 양이 한정적이더라도, TSMC에게는 단 한 방울의 물이 아쉬운 상황입니다.

▲ 세계 주요국 물 빈곤지수.(자료=WPI/환경부 2019년 '물과 미래')
▲ 세계 주요국 물 빈곤지수.(자료=WPI/환경부 2019년 '물과 미래')

시선을 우리나라로 옮겨봅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해 DB하이텍과 키파운드리, SK하이닉스시스템IC, 매그나칩반도체 등 종합반도체기업(IDM)·파운드리 기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수자원이 얼마나 있는지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고, 또 국내 양대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물을 얼마나 쓰는지도 체크해보겠습니다.

한국수자원공사가 국제인구행동연구소(PAI) 자료를 인용해 2019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평균 강수량은 연간 1277mm로 세계 평균(807mm)보다 약 1.6배 많습니다. 하지만 1인당 연 강수 총량은 2546m³로 세계 평균(1만5044m³)보다 적다고 하죠. 다만 이 지수는 단순 강수량과 인구밀도만 갖고 수치화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습니다. 

영국 생태환경·수문학센터(CEH)에서 제공하는 물 빈곤 지수(WPI)도 자주 쓰입니다. 수자원 접근율과 물 이용량, 사회경제요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데이터입니다. 이 기준으로도 우리나라는 147개국 중 43위이며 OECD 29개국 중 20위입니다. PAI 기준보다 WPI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건 우리나라 수자원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의미겠지만, 여전히 안전한 수준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 삼성전자(상단)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제작 과정에서 취수하는 물의 양은 연간 2억 톤이 넘는다. 그리고 반도체 공정이 고도화될 수록 물은 더 쓸 수밖에 없다.(사진=삼성전자·SK하이닉스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갈무리)
▲ 삼성전자(상단)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제작 과정에서 취수하는 물의 양은 연간 2억 톤이 넘는다. 그리고 반도체 공정이 고도화될 수록 물은 더 쓸 수밖에 없다.(사진=삼성전자·SK하이닉스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갈무리)

국내 양대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물을 얼마나 쓸까요. 삼성전자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 하이닉스는 ’지속경영보고서’라는 이름으로 매년 자사의 ESG 활동을 밝히는데요. 이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의 취수량은 1억3345만 톤이었고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464만 톤을 취수했죠. 두 회사 물 취수량을 합치면 2억 톤을 훌쩍 넘습니다.

이게 얼마나 많은 수치인지 알아보기 위해 대한민국 인구의 총급수량과 비교해봤습니다. 국가지표체계 홈페이지 기준 2019년에 총급수량으로 66억6600만 톤(물은 세제곱미터 당 1톤)이 기록됐으니, 두 회사에서 취수하는 물의 양은 대한민국 인구의 물 급수량 대비 3.3%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수치는 반도체 산업에 물이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를 가늠케 하죠.

▲ (자료 환경부 '상수도통계', e-나라지표 '국가지표체계')
▲ (자료 환경부 '상수도통계', e-나라지표 '국가지표체계')

물론 한국이 ‘물 부족 국가’라는 이야기는 다소 논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1인당 강수량은 그 나라의 수자원 관리 역량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이죠. 예컨대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주변 국가들은 땅이 넓고 인구밀도가 낮다는 이유로 PAI 지표 기준으로 '물 풍요 국가'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이에 '물 부족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프로파간다적로 보는 시각도 있죠.

다만 그럼에도 수자원 부족은 향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점차 가속화되고 있는 기후 변화가 장기적으로 물 부족 사태를 일으킬 게 확실시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매년 강수량은 늘어나지만 비가 집중적으로 내려 담수능력은 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상청이 10년 단위로 강수량을 조사한 과거 데이터를 보면 연강수량은 14% 증가했지만 연 강수일수는 7% 감소했다고 하죠. 또 장마철인데 비가 내리지 않는 ‘마른 장마’도 201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서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기후 변화는 반도체 업계에 ‘리스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반도체 공장을 다수 두고 있는 중국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중국은 1년 중 물이 부족한 달이 절반 이상이나 되죠. 수자원이 적고 인프라가 잘 갖춰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또 가뭄이 아니더라도 극심한 한파도 물 공급에 문제가 됩니다. 지난 2월 미국 텍사스주가 완전히 얼어붙었던 당시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 가동이 한 달 이상 멈춘 게 대표적입니다. 물을 공급해줄 배관이 동파되면서 현지 공장을 아예 가동할 수 없게 된 것이죠.

▲ 지난 2월 역사적 한파로 눈을 뒤집어 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전경. (사진=flickr.com, European Space Agency)
▲ 지난 2월 역사적 한파로 눈을 뒤집어 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전경. (사진=flickr.com, European Space Agency)

그래서 최근 1년새 대두되고 있는 물 문제는 여러모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우리나라가 수자원이 많다고는 하나 언제 대만처럼 가뭄이 찾아올지 모르며, 또 지구 온난화 추세가 지속되면 폭우와 가뭄이 더 심해질 텐데, 이 경우 수자원 관리는 어려워질 겁니다. 물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 반도체 업계에 물 문제가 현실화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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