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을 계기로 신세계와 롯데의 대결이 재차 주목받고 있죠. 오랜 기간 국내 유통시장을 주름잡아온 두 거대 공룡이 과연 ‘이커머스(e-Commerce)’ 시장에서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을지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누가 이베이코리아를 가져가느냐에 따라 판도가 완전히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죠.

이커머스 시대가 도래하며 한창 분주한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업체가 있는데요. 바로 현대백화점입니다. 유통 3사로 꼽히는 업체 중 현대백화점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유통 빅2와 달리 상대적으로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백화점의 사업포트폴리오나 현재 상황을 보면 롯데나 신세계처럼 이커머스 시장에 전력투구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유통공룡이긴 하지만 마트나 할인점 등의 판매채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온라인 시장 확대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겠지만, 쿠팡과 굳이 전면전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일반 공산품을 판매하는 쿠팡과 상품군이 크게 겹치지도 않습니다.

신사업 확장, 한발 한발 신중히?

물론 여기에는 사업적 이유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을 이끄는 정지선 회장의 경영 스타일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 회장은 지난 2007년 35세의 어린 나이에 회장직에 오르며 그룹을 이끌게 됐는데요. 이미 이전부터 ‘선(先) 안정 후(後) 성장’ 전략을 내세우며 초기부터 효율과 안정을 중시하는 경영 스타일을 보여줬습니다.

2010년을 기점으로 변화를 주긴 했습니다. 과거 기사들을 찾아보면 창립 39주년이기도 했던 2010년에  'PASSION(열정)비전- 2020'을 선포하며 대형 투자와 M&A를 통해 2020년까지 실적을 크게 개선하겠다고 밝혔죠. 구체적으로 매출액 20조원, 경상이익 2조원, 현금성자산 8조원을 목표로 설정했었습니다.

▲ 현대백화점 지분도.(출처=공정거래위원회.)
▲ 현대백화점 지분도.(출처=공정거래위원회.)

결과만 놓고 보자면 매출액 20조원의 목표는 달성했습니다. 2020년 현대백화점그룹은 유통, 패션, 리빙∙인테리어 부문에서 총 20조1000억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10년 만에 매출규모를 대략 3배 확대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물론 경상이익과 현금성자산은 목표치에 크게 모자라긴 했지만, 매출과 달리 이익과 현금은 대외변수 영향이 큰 만큼, 매출목표 달성에 높은 점수를 줘야겠죠.

정 회장의 공언처럼 현대백화점그룹은 2010년대 들어 M&A를 통해 사세를 확장했습니다. 2011년 당시 업계 2위 가구 업체인 리바트를 인수하며 인테리어 사업을 확장했고요. 2012년에는 한섬 지분 34.6%를 4200억원에 사들이며 패션업에도 진출했습니다. 이후 SK네트웍스 패션부문, 한화 L&C 등을 인수해 사업 덩치를 불렸습니다. 2020년에는 화장품 원료회사 SK바이오랜드, 기업복지몰 업계 1위업체 이지웰을 품에 안았죠. 유통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며 사업 안정성을 높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백화점의 사업확장 역사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신세계, 롯데와 달리 한발 한발 신중히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 사례들을 한 번 보시죠. 현대백화점은 연간 1000억원의 수익을 내 효자로 자리잡은 패션업체 한섬을 지난 2012년에 사들였는데요. 이에 앞서 신세계는 자회사 신세계인터내셔날을 통해 한창 패션사업 확장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단순 패션 유통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제품을 만들어 파는 제조사업까지 영역을 넓힌다는 계획이었죠. 결국 2011년 국내 토종 브랜드 톰보이를 인수하며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시켰죠. 신세계가 톰보이를 인수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백화점이 한섬을 통해 패션제조사업에 진출한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국내 천연화장품 원료 1위 업체 SK바이오랜드를 인수하며 화장품 사업에도 본격 진출했습니다. 백화점 중심 유통채널 업체가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어 주목을 받았는데, 사실 이것도 신세계가 가장 먼저 시작했습니다. 2012년 국내 브랜드 비디비치를 인수해 패션유통업체로서는 최초로 화장품 사업에 진출한 것이었죠.

패션과 화장품 사업을 영위하는 신세계 계열사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실적 구성을 보실까요. 2020년 기준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총 555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는데요. 이중 80%가 코스메틱 사업에서 발생했습니다. 나머지 20%는 패션 및 라이프스타일 사업에서 창출됐죠. 이처럼 신세계는 이미 일찌감치 화장품 사업에 공을 들였습니다. 물론 신세계는 화장품 제조업에서는 손을 떼며 브랜드 사업에만 집중하기로 했지만, 어쨌든 화장품 쪽은 신세계가 이미 한 번 닦아놓은 길입니다.

'성장과 효율 동시 추구' 이커머스 시대 통할까

정지선 회장의 성장과 효율을 동시에 추구하는 경영방침은 어쨌든 좋은 결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10년 장기 매출목표도 달성했고, 사업포트폴리오도 다변화하는데 성공했죠. 불확실한 사업환경 속에서 보수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을 두고 좋다 나쁘다 할 일은 아닙니다. 돈만 잘 벌면 되는 거죠.

다만 앞으로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현대백화점이 오히려 뒤늦게 진출했다 부침을 겪고 있는 사업도 있죠. 바로 면세점 사업입니다. 면세점은 롯데가 국내서 가장 초기에 시작해 업계 1위 사업자로 활약하고 있고요. 호텔신라와 신세계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세 업체 모두 국내외 여행객들이 꾸준히 늘며 면세사업에서 엄청난 이익을 거뒀죠. 특히 롯데는 2010년대 중반에는 매년 수천억원의 이익을 뽑아냈습니다.

후발주자인 현대백화점은 현재 면세사업에서 약 2000억원에 달하는 누적 적자를 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사업 초기 단계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코로나19라는 이례적 악재를 만나기도 했죠. 초기 비용부담을 안고 점포를 늘린 만큼 앞으로 적자규모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럼에도 약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면세사업은 특성상 명품 브랜드 유치가 필수로 꼽히는데, 현대백화점은 경쟁사와 비교해 명품 브랜드를 많이 유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현대백화점 2030년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출처=현대백화점.)
▲ 현대백화점 2030년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출처=현대백화점.)

이러한 현상이 온라인 시장에서도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물론 현대백화점은 공식적으로 매출 늘리기 중심의 이커머스 시장 확장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차별화 전략으로 접근하겠다는 것인데요. 결국엔 리스크가 너무 큰 출혈경쟁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물론 현대백화점은 롯데나 신세계와 달리 사업구조상 이커머스 시장 확장이 어려운 점도 있긴 합니다. 대형마트나 할인점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이커머스 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업에 진출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이커머스 시장 경쟁은 서바이벌이나 마찬가지”라며 “지금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득보다는 실이 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현대백화점은 이커머스 진출 대신 차별화 전략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유통, 패션, 인테리어 등 기존 잘하는 사업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계획입니다. 온라인 통합 플랫폼을 만들기보다는 전문성 있는 각자 판매채널 강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현대백화점은 이커머스 시대를 맞아 또 다시 ‘도전’보다는 ‘차별화’를 택한 것인데요. 이것이 리스크 요인을 제거하는 신의 한 수가 될지, 아니면 미래 성장동력을 놓치는 선택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뒤늦게 뛰어들더라도 한섬 같은 효자 기업을 키울 수도 있고, 면세사업처럼 초반 부침을 겪을 수도 있죠. 과연 정지선 회장의 이커머스 시대 전문몰 전략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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