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사진=flickr.com/Tal Atlas)
코로나19라는 이벤트가 반도체 업계에 준 일련의 변화를 살펴봅시다. 바이러스 확산 초반엔 IT기기가 안 팔릴 것이라 예상한 반도체 기업들이 투자를 크게 줄였죠. 실제로 세계 주요국들의 실업률이 늘면서 예상대로 소비가 급감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달안에 이 추세를 바꾼 건 재택근무와 온라인 소비 등으로 대표되는 ‘언택트’와 ‘홈코노미’라는 비대면 환경의 보편화였습니다.

구체적으론 스마트폰과 노트북, 태블릿PC 등 IT기기 판매와 사용이 늘었고, 이에 급증하는 정보량에 대응하기 위해 통신 사업자들은 5G 네트워크를 확장했고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은 데이터센터 증설에 나섰습니다. 또 재난지원금 등 정책의 영향으로 TV와 신가전 등을 중심으로 생활가전도 불티난 듯 팔렸죠. 전력반도체·집적회로·로직반도체·센서 등 각종 아날로그 반도체 수요도 전방위적으로 늘었고, 이에 차량용 반도체에서 시작된 산업계 ‘반도체 쇼티지’ 사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요.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지난 4월 9일 역사상 신고점을 갈아치웠다.(이미지=네이버 금융)

일련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반도체 업계의 매출 증가로 나타났습니다. 나스닥에 상장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반도체 산업의 시총 변화를 보여주는 지수인데요. 2020년 3월을 기점으로 이 지수는 우상향하고 있고, 지난 4월 9일 종가 기준 3305.43포인트로 역사적 신고점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업계 실적도 봅시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트’에 따르면 2020년 인텔과 삼성전자, TSMC, SK하이닉스, 퀄컴 등 상위 15개 반도체 기업 가운데 11곳의 매출이 늘었습니다. 이들 회사의 2019년 대비 2020년 매출은 13% 증가했죠. 같은 기간 아날로그 반도체에선 세계적으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와 NXP반도체, 인피니온 등이 수혜를 봤고, 국내에선 DB하이텍, 실리콘웍스, SK하이닉스시스템IC 등이 호실적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 이 산업에선 전세계적 설비 투자 확대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IT 소비가 늘어나는 게 ‘추세’가 됐다고 판단한 반도체 기업들이 수요 과잉에 대한 걱정 없이 설비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이죠. ASML,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도쿄일렉트론 등 세계적 장비 기업들의 수주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게 이를 증명합니다.

상위 15개 반도체 기업 매출 순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2, 4위에 올랐다.(표=IC인사이트)
 
우리나라도 반도체 생태계가 급격히 커지는 모습입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 반도체 설비와 장치 투자에 8조4828억원을 썼는데 이는 6조447억원을 썼던 지난해 1분기 대비 40.3% 늘어난 겁니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도 2조3630억원에서 4조3510억원으로 무려 84.1%나 늘렸죠. 참고로 SK하이닉스의 경우 내년 상반기 투자분 일부를 올해 하반기에 당겨서 집행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작금의 강한 수요세가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라 예상한 것이죠.

그리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반도체 제조·검사 장비를 만드는 ‘소부장’ 기업들도 수혜를 보고 있습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는 기업들이 최근 사업연도 매출액의 10%(코스닥 상장사 기준, 코스피는 5%) 이상 판매 계약을 맺은 내용이 공시됩니다. 모든 수주를 다 알 순 없겠지만 큰 규모의 것들은 확인해볼 수 있겠죠.

지난해와 올해 수주계약 상황을 비교하면 그 추세를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우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전년 상·하반기 대비 제조·검사 장비를 대규모로 발주했습니다. 이는 올해 상반기 5개월만 놓고 본 것이니, 남은 1개월간 이뤄질 투자까지 생각하면 규모는 더 커질 전망입니다.


삼성전자의 경우 국내와 중국 법인을 중심으로 지난 1~5월 새 2020년보다 더 많은 장비를 산 것으로 보입니다. 5월 말까지 총 36곳에 제품을 발주했는데, 이는 2020년 34곳보다 두 곳 많습니다. 액수로도 6872억원으로 전년(3948억원)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었죠.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비메모리반도체, 파운드리까지 하고 있고, 또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를 목표로 두는 만큼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듯합니다.

삼성전자의 소부장 생태계엔 어떤 기업이 있나 확인해봅시다. 반도체 테스트 장비 기업 와이아이케이는 8건의 수주, 2221억원의 총 수주액으로 규모, 건수 모두 가장 컸습니다. 이 회사가 만드는 EDS(Electrical Die Sorting) 장비는 반도체 수율 향상에 필수적이라 합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8월 와이아이케이에 473억원을 투자해 2대 주주로 12.10%의 지분을 확보했죠. 삼성이 이 회사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찬가지로 삼성전자가 3.8%의 지분을 가진 원익IPS는 단일 계약상 가장 큰 규모인 1160억원의 수주를 얻었습니다. 이 회사는 반도체·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식각 장비를 만드는 회사죠. 삼성전자의 오랜 협력사이자 비메모리용 식각 장비를 만드는 테스도 5건의 수주로 누적 계약액은 1216억원입니다. 반도체 검사장비인 번인 테스터(Burn-in Tester)와 웨이퍼 레벨 테스터를 만드는 디아이도 6건의 수주, 1118억원의 누적 수주액을 거뒀습니다.

이밖에 반도체 테스터와 핸들러를 만드는 제이티(수주 3건·총 수주액 309억원), 반도체 검사용 진공펌프를 만드는 엘오티베큠(3건·279억원),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용 화학약품의 자동화 공급 장비를 만드는 씨앤지하이테크(1건·174억원), 반도체 클린룸용 장비를 만드는 위드택(1건·111억원), 열처리 장비를 만드는 예스티(1건·36억원), 반도체 수율 개선을 위한 시스템 API를 만든 나무기술(1건·11억원) 등이 삼성전자의 수주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SK하이닉스도 추세는 비슷합니다. 2021년 1~5월 발주 건수는 16건, 총 발주 액수는 2625억원으로 이는 지난 한 해 총 투자액(3256억원)의 80.6%를 5개월 만에 집행한 겁니다. 삼성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뿐이지, SK하이닉스의 투자도 만만찮습니다. 내년까진 이어질 서버·IT향 D램과 낸드플래시의 상승세에 하루 빨리 편승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죠.

SK하이닉스의 소부장 생태계엔 어떤 기업이 있을까요. 에이디테크놀로지는 SK하이닉스에 메모리 컨트롤러 집적회로(IC)로 총 3건, 934억원을 수주했습니다. 디자인하우스인 에이디테크놀로지는 SK하이닉스로부터 구매주문서를 받고 TSMC에 대신 제품 위탁생산을 맡기는 식으로 장기간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다만 지난해 3월 TSMC와의 VCA(Value Chain Aggreator)가 해지된데 이어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DSP(Design Solution Partner)로 등록한 만큼 조만간 SK하이닉스가 아닌 삼성전자의 생태계로 편입될 것으로 보입니다.


뒤이어 반도체 주요 공정용 식각 장비를 만드는 에이피티씨가 SK하이닉스에 3건의 수주, 총 585억원의 수주액을 기록했고요. 반도체·디스플레이 증착 장비를 만드는 유서 깊은 주성엔지니어링(2건·275억원)의 이름도 보입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지난해 디스플레이 수주가 급감하며 연간 적자를 기록했는데, 올해는 반등하는 모습입니다.

이밖에 반도체 자동화 설비를 만드는 SK㈜ 자회사 에스엠코어(1건·257억원), 반도체 증착 장비 제조사 유진테크(2건·244억원), 삼성전자의 생태계에도 이름을 올린 테스(2건·241억원), 반도체·디스플레이 레이저 가공 장비를 만드는 코세스(1건·43억원),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모니터링 장비를 만드는 위드텍(1건·23억원), 반도체 계측 장비를 만드는 오로스테크놀로지(1건·23)억원 등이 SK하이닉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각사 공시를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건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곳은 삼성전자에만, SK하이닉스에 납품하는 곳은 SK하이닉스에만 납품한다는 건데요. 실제로 올 한 해 두 기업에 동시에 수주를 따낸 곳은 테스, 그리고 최근 삼성전자에 원자층증착(ADL) 장비를 수주한 것으로 알려진 유진테크, SK하이닉스에 제품을 납품하고 있다고 사업보고서에 밝힌 와이아이텍 외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로 반도체 산업의 특성이 자주 거론됩니다. 기업 간 기술 유출 우려가 심한 만큼, 한 생태계에 속한 기업은 다른 곳에 수주하기 쉽지 않은 것이죠.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거의 완벽하게 경쟁 관계이기도 합니다.

해외 수주를 잘 못하는 것도 국내 소부장 기업들의 특징입니다. 한미반도체와 유니테스트, 인텍플러스, 제너셈, 테크윙, 제이티, 심텍 등을 제외하면 해외 수주를 공시한 기업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강국인 만큼, 다른 나라 기업들의 입장에선 국내 기업에 제품을 발주하는 판단을 내리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 보이는 이유입니다.

(사진=pixabay.com)

국내 고객사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높은 건 ‘슈퍼사이클’을 타고 있는 현 상황에선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2017~2018년 반도체 업계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은 뒤 2019년 무너졌을 때처럼, 지금 업계 전체가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는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라 보장할 순 없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모아둔 돈이 많아 괜찮지만, 버는 족족 상당액을 R&D에 쓸 수밖에 없는 소부장 기업들은 그런 상황에 재무 구조가 취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최근 중국과 미국, 대만의 반도체 산업 투자도 국내 기업들에겐 우려스러운 지점입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제조장비 매출은 711억9000만달러(약 79조원)를 기록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187억2000만달러(약 20조8000억원) 규모의 장비가 중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비록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릴 것이란 '제조 2025'는 물 건너가는 모습이지만, 여전히 정부 차원에서 자국 반도체 산업에 돈을 대주고 있는 중국은 충분히 위협적입니다.

또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가 자국 반도체 산업을 공격적으로 밀어주며 내재화를 강조하고 있죠. 반도체 설비투자의 최대 40%를 세액 공제하는 한편 5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안도 발의된 상태입니다. 대만도 TSMC와 UMC 등을 필두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자하고 있고 정부도 R&D투자액의 15%를 세액 공제하고 있습니다.

향후 나쁜 상황을 지금부터 걱정하는 게 다소 기우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2019년 글로벌 반도체 공급과잉과 함께 벌어졌던 ‘치킨게임’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여기에 최근 거세지고 있는 중국과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공세도 생각한다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해선 안 될 겁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5월 13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K-반도체 전략'을 공유했는데, 국내 반도체 산업이 잘 되고 있는 지금 국가 차원에서 약점을 보완하는 전략적 판단은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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