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은행연합회가 지난 4월 각 은행에 배포한 가상자산사업자 평가 방안을 수일 내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아직 은행의 실명확인계좌(이하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한 거래소는 다시 심사 준비에 나설 수 있게 됐지만 업계에선 은행 평가가 우선인 절차부터 정부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7일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국회의원이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주최한 '가상자산 투자자 보호 및 실명계좌 발급 개선 방안 정책포럼'에서 박창옥 전국은행연합회 본부장은 "외부의 많은 요구에 따라 이번 주, 혹은 다음 주 초에 은행연합회의 가상자산사업자 평가 방안 공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박창옥 전국은행연합회 본부장(오른쪽 두 번째)을 비롯해 7일 개최된 가상자산 정책 포럼에서 토론을 준비 중인 패널들 (사진=이건한 기자)
▲ 박창옥 전국은행연합회 본부장(오른쪽 두 번째)을 비롯해 7일 개최된 가상자산 정책 포럼에서 토론을 준비 중인 패널들 (사진=이건한 기자)

시험 범위도 모르고 시험장에 들어간 거래소들
가상자산사업자 평가 방안은 시중은행이 가상자산 거래소(이하 거래소)에 실명계좌를 발급하기 전 거래소의 자금세탁 위험도, 사업 영속성, 내부통제 수준 등을 평가하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총 100여개 이상의 상세 항목으로 구성되며 항목별 점수에 따라 각 거래소별 위험 등급이 결정된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실명계좌 발급 심사 통과를 위해 충족해야 할 주요 요건이지만 은행연합회의 평가 기준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된 바 없다. 한마디로 시험 범위도 모른 채 시험장에 들어가야 했던 셈이다. 국내에서는 특금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라 올해 9월 말까지 거래소를 포함한 모든 가상자산사업자는 은행과 실명계좌 발급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이를 충족하지 못한 사업자는 불법 사업자로 간주, 사실상 사업을 접어야 한다. 거래소들이 은행 실명계좌 확보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박 본부장은 그동안 평가 방안 공개를 꺼린 이유로 △은행연합회와 은행별 평가 지침이 다른 부분에 있어 혼선 발생 및 이의제기가 발생할 우려 △평가 기준이 공개될 경우 거래소가 해당 기준 충족에만 집중함으로써 잠재적 위험도가 실제보다 낮게 평가될 위험 등을 꼽았다. 다만 늦게나마 공개를 결정한 배경에는 "평가 방안에 대한 불확실한 오해를 해소하고 신고 기한이 9월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거래소 존폐에 따른 투자자 보호를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심사 포기한 은행…정부, "거래소 평가는 은행 몫"
다만 이번 평가 기준 공개가 실명계좌 발급률에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미지수다. 거래소가 획득한 등급과 별개로 은행권에서 여전히 실명계좌 발급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은행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실명계좌를 발급한 거래소에서 자금세탁 범죄나 기타 금융사고가 발생할 경우 거래소를 심사한 은행이 연대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6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거래소에서 자금세탁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은행에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는 요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은 바 있다. 금일 행사에서 전은주 금융정보분석원(FIU) 기획행정실 팀장도 "거래소 평가는 은행의 몫"이란 점을 강조했다. 국제적 기준이나 특금법에 명시된 내용상으로도 은행이 거래하는 고객에 대해선 직접 자금세탁방지 평가를 하도록 규정돼 있으며 FIU는 신고를 마친 사업자의 자금세탁방지 의무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역할이란 설명이다. 이에 업계에선 은행들이 잠재적 리스크에 대한 압박으로 사실상 거래소 심사를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차라리 정부가 먼저 검증하고 은행이 실명계좌 달라"
이날 패널로 참석한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들은 FIU와 은행연합회에 여러 개선사항을 요구했다. 그중 도현수 블록체인기업진흥협회 가상자산위원장은 실명계좌 발급 절차 자체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근 금융위 등 정부기관은 개별 거래소에 인력을 파견하고 일주일 이상 상주하며 강도 높은 현장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 이후 거래소가 사업 신고서를 제출하면 FIU가 다시 두 달간의 검토 과정을 거치며, 신고 수리 후에도 금융위가 재차 현장 실사를 나갈 예정이다. 즉, 사업 신고 과정에서 이미 정부기관의 철저한 검증 절차가 수반되는 만큼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을 먼저 요구할 게 아니라 정부 심사를 통과한 거래소에 은행이 실명계좌를 발급하도록 절차를 바꾸면 해결될 문제란 이야기다. 이는 은행이 사전심사 단계에서 겪고 있는 부담을 줄일 수도 있는 방안이다.

▲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 (사진=이건한 기자)
▲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 (사진=이건한 기자)

은행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날 연사로 나선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는 "모든 것을 법에 있는 대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현재 실명계좌 발급의 키를 은행이 쥐고 있는 것처럼 해석되고 있지만 실제 특금법 조항을 보면 거래소가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은 단 세 가지에 불과하다. 특금법은 신고제인 만큼 기본적으로 조건만 갖추면 신고를 수리해야 하는 것이 맞고, 은행의 경우 거래소의 발급 기준 달성 여부만 판단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또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역시 거래소에서 사고 발생 시 귀책 사유가 거래소에 있다면 은행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처럼 현재 은행에 주어진 자금세탁방지 의무는 과한 수준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어 "은행이 갖는 과도한 공포를 해소하고 거래소가 제도권에 진입하는 게 은행과도 상생하는 길"이라며 "언젠가 은행도 비슷한 사업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올해 국내에서 영업 중인 거래소는 약 60여곳, 전체 이용자 수는 700만명 수준이다. 이중 실명계좌를 확보하고 최소한의 사업 신고 조건을 갖춘 거래소는 4곳(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에 불과하다. 모두 특금법 개정 이전 실명계좌 계약을 체결한 업체다. 업계에서는 신고 마감 기한인 9월까지 이들을 제외한 거래소들이 실명계좌 확보에 실패할 경우 대규모 폐업이 불가피하고 4대 거래소 시장 독과점에 따른 잠재적 이용자 피해 등을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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