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은행연합회가 지난 4월 각 은행에 배포한 가상자산사업자 평가 방안을 수일 내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아직 은행의 실명확인계좌(이하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한 거래소는 다시 심사 준비에 나설 수 있게 됐지만 업계에선 은행 평가가 우선인 절차부터 정부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7일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국회의원이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주최한 '가상자산 투자자 보호 및 실명계좌 발급 개선 방안 정책포럼'에서 박창옥 전국은행연합회 본부장은 "외부의 많은 요구에 따라 이번 주, 혹은 다음 주 초에 은행연합회의 가상자산사업자 평가 방안 공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실명계좌 발급 심사 통과를 위해 충족해야 할 주요 요건이지만 은행연합회의 평가 기준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된 바 없다. 한마디로 시험 범위도 모른 채 시험장에 들어가야 했던 셈이다. 국내에서는 특금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라 올해 9월 말까지 거래소를 포함한 모든 가상자산사업자는 은행과 실명계좌 발급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이를 충족하지 못한 사업자는 불법 사업자로 간주, 사실상 사업을 접어야 한다. 거래소들이 은행 실명계좌 확보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박 본부장은 그동안 평가 방안 공개를 꺼린 이유로 △은행연합회와 은행별 평가 지침이 다른 부분에 있어 혼선 발생 및 이의제기가 발생할 우려 △평가 기준이 공개될 경우 거래소가 해당 기준 충족에만 집중함으로써 잠재적 위험도가 실제보다 낮게 평가될 위험 등을 꼽았다. 다만 늦게나마 공개를 결정한 배경에는 "평가 방안에 대한 불확실한 오해를 해소하고 신고 기한이 9월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거래소 존폐에 따른 투자자 보호를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6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거래소에서 자금세탁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은행에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는 요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은 바 있다. 금일 행사에서 전은주 금융정보분석원(FIU) 기획행정실 팀장도 "거래소 평가는 은행의 몫"이란 점을 강조했다. 국제적 기준이나 특금법에 명시된 내용상으로도 은행이 거래하는 고객에 대해선 직접 자금세탁방지 평가를 하도록 규정돼 있으며 FIU는 신고를 마친 사업자의 자금세탁방지 의무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역할이란 설명이다. 이에 업계에선 은행들이 잠재적 리스크에 대한 압박으로 사실상 거래소 심사를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근 금융위 등 정부기관은 개별 거래소에 인력을 파견하고 일주일 이상 상주하며 강도 높은 현장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 이후 거래소가 사업 신고서를 제출하면 FIU가 다시 두 달간의 검토 과정을 거치며, 신고 수리 후에도 금융위가 재차 현장 실사를 나갈 예정이다. 즉, 사업 신고 과정에서 이미 정부기관의 철저한 검증 절차가 수반되는 만큼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을 먼저 요구할 게 아니라 정부 심사를 통과한 거래소에 은행이 실명계좌를 발급하도록 절차를 바꾸면 해결될 문제란 이야기다. 이는 은행이 사전심사 단계에서 겪고 있는 부담을 줄일 수도 있는 방안이다.
은행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날 연사로 나선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는 "모든 것을 법에 있는 대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현재 실명계좌 발급의 키를 은행이 쥐고 있는 것처럼 해석되고 있지만 실제 특금법 조항을 보면 거래소가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은 단 세 가지에 불과하다. 특금법은 신고제인 만큼 기본적으로 조건만 갖추면 신고를 수리해야 하는 것이 맞고, 은행의 경우 거래소의 발급 기준 달성 여부만 판단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또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역시 거래소에서 사고 발생 시 귀책 사유가 거래소에 있다면 은행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처럼 현재 은행에 주어진 자금세탁방지 의무는 과한 수준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어 "은행이 갖는 과도한 공포를 해소하고 거래소가 제도권에 진입하는 게 은행과도 상생하는 길"이라며 "언젠가 은행도 비슷한 사업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올해 국내에서 영업 중인 거래소는 약 60여곳, 전체 이용자 수는 700만명 수준이다. 이중 실명계좌를 확보하고 최소한의 사업 신고 조건을 갖춘 거래소는 4곳(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에 불과하다. 모두 특금법 개정 이전 실명계좌 계약을 체결한 업체다. 업계에서는 신고 마감 기한인 9월까지 이들을 제외한 거래소들이 실명계좌 확보에 실패할 경우 대규모 폐업이 불가피하고 4대 거래소 시장 독과점에 따른 잠재적 이용자 피해 등을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