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현대차그룹.(사진=현대차)
▲ 현대차그룹.(사진=현대차)

전기차 등 미래형 모빌리티를 강화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이 이번에는 오랜 기간 '아픈 손가락'이던 불법파견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현대제철은 자회사 '현대ITC'를 설립해 당진제철소 등 국내 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내하청 근로자를 고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사내하청 업체 43곳에서 근무하는 6500여명의 근로자가 대상입니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은 현대차와 기아 등 완성차 공장에서 근무한 사내하청 근로자만 순차적으로 직접고용했는데요. 지난해부터 법원 등에서 불법파견 판결이 나온 계열사에 한해 고용을 추진하고 있죠. 단 계열사에는 자회사를 설립해 직접고용하는 방식입니다. 현대제철과 여타 계열사들은 골치이던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불법파견은 근로자 파견이 불가능한 업종에서 원청이 직원을 파견받은 것처럼 사용해 파견법을 어겼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원청이 '유령 회사'를 중간에 두고, 이 회사 소속 근로자를 자사의 직원처럼 사용했다는 거죠. 고용관계는 유령업체와 맺고, 업무 지시는 원청이 했다는 의미입니다. 

현행 파견법에서 근로자 파견이 가능한 업종은 비서와 건물청소, 텔레마케터 등입니다. 제조업은 근로자 파견이 현행법상 불가능한데, 현대차그룹은 1990년대부터 현대차부터 사내하청 근로자의 사용을 확대했습니다. '자가용 시대'에 들어서자 자동차 주문이 밀려 들었고, 부족한 일손을 사내하청 근로자로 메웠던거죠.

사내하청은 계열사까지 확대됐고, 2000년대 이후 사내하청에 노조가 생기면서 불법파견 소송(파견법 위반 소송)이 확대됐습니다. 

현재까지 현대차와 기아 등 완성차와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현대위아 등 부품 계열사까지 불법파견 소송이 제기됐죠. 그런데 현대차와 여타 계열 회사들은 이 소송에서 대부분 졌습니다. 현대차 남양연구소의 시험차량을 시운전하는 드라이버 또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죠. 카마스터(자동차 판매원)와 자동차 설계도 실측 업무를 하는 근로자의 불법파견 소송을 제외하면 노조가 모두 이겼습니다. 

▲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해 현대차 노조를 찾아 노사화합을 강조했다.(사진=현대차 노조)
▲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해 현대차 노조를 찾아 노사화합을 강조했다.(사진=현대차 노조)

하청업체 근로자가 소송에서 이겼으니 문제가 해결됐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국민의 법 감정이 '3심제'를 원하듯 불법파견 소송에서도 '3심'까지 가는게 대부분입니다. 현대차는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보자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최씨 등 사내하청 근로자가 1심에서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이후 2013년 회사에 복직하기까지 약 8년이 걸렸습니다.

이후 현대차는 5000명 넘는 사내하청을 정규직으로 채용했고, 계열사에서는 대법원 판결 이전 자회사를 통한 채용을 추진하는 중입니다. 이 모델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현대제철 '중규직' 제안...'일장일단'은
현대제철이 추진 중인 '자회사를 통한 직접고용'을 노동계에서는 '중규직' 또는 '준정규직'이라고 합니다. 사내하청 신분일 때는 업체가 원청으로부터 계약해지되거나 폐업할 경우 고용이 불안정해집니다. 이 때문에 사내하청 노동자의 경우 고용형태는 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이라고 합니다.

현대제철이 자회사를 설립해 사내하청 근로자를 직접고용할 경우 고용은 안정됩니다. 급여수준은 정규직일 때와 사내하청일 때의 중간 정도로 오르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미 법원에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는데, 급여는 정규직보다 낮으니 '준정규직'이라고 표현하는거죠.

현대제철은 사내하청 노동자가 현대ITC에 채용될 경우 정규직의 80% 수준으로 임금을 지급하고, 위로금 1000만원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현대ITC는 현대제철이 사내하청 노동자를 채용하기 위해 설립 예정인 자회사입니다. 생산설비가 없는 일종의 '인력공급 업체'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자회사를 통한 직접고용을 금전적인 문제로 보면 노사 모두에 이익인 건 맞습니다. 먼저 현대제철의 경우 1심과 2심 소송에서 모두 패했습니다. 대법원까지 소송을 진행할 경우 지불해야할 체불임금이 더 커지게 됩니다. '한푼'이라도 아끼려면 합의를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전까지 체불임금의 경우 근로자는 소송을 제기한 날부터 3년까지 소급해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삼표시멘트 불법파견 소송에서 불법행위로 인한 체불임금의 시효는 10년이라고 못박았습니다. 만약 현대제철이 대법원에서 질 경우 지불해야 할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는거죠. 현대제철은 2018년 통상임금 소송에서 지면서 약 3000억원을 충당금으로 반영한 전례가 있습니다.

▲ 현대제철 원가율 추이.(자료=금융감독원)
▲ 현대제철 원가율 추이.(자료=금융감독원)

현대제철이 직접 고용해야 할 사내하청 노동자는 약 6000명 가량입니다. 대법원에서 질 경우 현대제철이 직접고용해야 할 인원은 늘어나고 자회사를 통한 채용도 명분을 잃게 됩니다. 체불임금 규모도 재무적 부담이 되는 수준까지 늘어납니다.

자회사를 통해 고용할 경우 현대제철은 인건비 부담이 커집니다. 사내하청 업체에 주던 도급비용에 처우 개선 비용까지 얹어 줘야하죠. 지난해 기준 현대제철의 원가율은 94.1%입니다. 철광석 등 원재료 비용이 오르면서 철강업의 원가는 크게 올랐습니다. 

자회사를 통한 직접고용이 현대제철의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보다 비용이 20% 덜 들어갑니다. 자회사로 채용할 경우 가뜩이나 높은 원가를 조금이나마 낮출 수 있죠. 회사 입장에서는 대법원에서 승소할 수 있다는 '희망고문'을 하기 보다 가급적 비용이 덜 들어가는 방법을 택한거죠.

사내하청 노동자의 경우 어떨까요. 현대제철의 생산현장은 정규직보다 사내하청의 노동강도가 높고, 위험 업무가 사내하청에 몰리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임금은 정규직의 50~60% 수준입니다. 자회사에 입사할 경우 급여가 정규직의 80% 수준까지 오르는 만큼 처우가 개선되는 건 분명합니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경우 대법원 판결까지 기다려 '현대제철의 정규직'이 될지 자회사에 입사해 하루 빨리 처우를 개선할지를 두고 고민해야 합니다. '시간과 돈'의 문제인 셈입니다.

자회사 채용에 현장은 '혼돈', 세대 갈등도...안전사고 생길까 '우려'

이전 불법파견 소송이 시작되면 세대를 두고 갈등이 발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MZ 세대 직원들은 소송이 오래 걸려도 원청에 직접고용을 희망하고, 장년층들은 소송보다 합의를 희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장년층은 상대적으로 회사를 다닐 시한이 짧기 때문에 합의금을 선호하는거죠.

현대제철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현대제철의 사내하청 노동자 A씨의 설명에 따르면 제철소는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라고 합니다. A씨는 "일단 버티면 현대제철 정규직으로 갈 수 있는데 자회사로 가면 원청에 채용될 기회를 잃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 현대제철 비정규직 노조가 원청의 직접고용을 요구하고 있다.(사진=현대제철 비정규직노조)
▲ 현대제철 비정규직 노조가 원청의 직접고용을 요구하고 있다.(사진=현대제철 비정규직노조)

일단 현대제철비정규직 노조는 자회사 채용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현대제철의 정규직으로 채용될 때까지 원청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입장입니다. 현대제철비정규직(사내하청) 노조는 조합원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여는 등 소통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자회사 채용을 희망하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많아질 경우 투쟁 동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노 갈등'의 조짐도 보입니다.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의 현대제철 비정규직 노조가 지난 5월 설립됐습니다. 이 노조는 실리적 성향으로 자회사 채용에 긍정적인 분위기입니다. 민주노총 소속 노조와 한국노총 소속 노조가 서로 경쟁할 경우 직원간 갈등이 불거질 수 있습니다. 

현대제철은 과거 산업재해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사업장입니다. 완성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와 달리 현대제철 생산현장은 자칫하면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근무 중 주의가 필요합니다.

현대제철비정규직 노조에 따르면 산재 유형별로 '협착(끼임)'이 가장 많았고, △충돌 및 접촉 △전도 △추락 △낙하 순으로 사고가 많았습니다. 자회사 전환을 두고 생산현장이 어수선해질 경우 직원의 집중력 저하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설명입니다. 

현대제철에서 추진 중인 자회사를 통한 사내하청 채용은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공공부문의 정규직 전환 사례'와 유사합니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자회사를 설립해 하청업체 근로자를 직접 고용했었죠. 민간 영역에서는 SK브로드밴드가 자회사를 설립해 하청업체 기사를 채용한 사례가 있죠.

현대제철도 원청과 비정규직 노조간 합의점을 찾아 오래 지속된 불법파견 논란을 종식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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