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사진=주성엔지니어링 홈페이지 갈무리)
▲ (사진=주성엔지니어링 홈페이지 갈무리)

주성엔지니어링은 국내 1세대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입니다. 지금은 경쟁사가 많지만, 한때는 독보적 기술력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IT 중견기업으로 손꼽혔죠. 그런 주성엔지니어링이 최근 새로운 먹거리를 찾은 듯합니다. 그간 지지부진했던 태양전지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겁니다.

지난 19일 주성엔지니어링은 24.45%의 발전 전환효율을 가진 양산용 태양전지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습니다. ‘발전 전환효율’(또는 광전환 효율)은 전지가 태양 빛을 받아 전기로 바꾸는 비율을 뜻합니다. 주성엔지니어링에 따르면 현재 시중에서 유통되는 태양전지의 광전환 효율이 약 21%이며, 이번에 새롭게 개발한 태양전지는 기존 가정용 제품 대비 설치 면적과 필요 모듈 개수를 각각 18%, 16%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회사로 잘 알려진 주성엔지니어링의 태양전지 개발 소식이 다소 생소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주성엔지니어링이 태양전지 사업에 뛰어든 지 20년 가까이 됐다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2010년대 후반 들어 태양전지 사업 비중이 미미해진 와중에도 연구개발은 이어왔죠.

▲ 주성엔지니어링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태양전지 평가에서 발전 전환효율 24.45%를 기록했다.(사진=주성엔지니어링)
▲ 주성엔지니어링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태양전지 평가에서 발전 전환효율 24.45%를 기록했다.(사진=주성엔지니어링)

굴곡진 주성엔지니어링의 태양전지 개발사
주성엔지니어링이 태양전지 사업에 뛰어든 건 2006년입니다. 당시 공시를 보면 정관상 사업목적에서 ‘태양전지 제조 장비의 제조 및 판매’를 추가했습니다. 실리콘을 원료로 하는 결정질 태양전지와 관련 장비를 만들어 회사의 새 비즈니스로 삼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를 위해 2000년대 후반 프랑스 원자력위원회와 태양전지 공동 개발 협약을 맺는 한편 인도 골드스톤, 중국 강소종예 등과 합작법인을 세우기도 했죠.

본업에서 잘 나가고 있었음에도 태양전지 사업을 하게 된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습니다. 우선 주성엔지니어링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장비 제조기술과 태양전지 제조기술에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주된 재료가 모두 실리콘이란 점도 같지만 박막, 흡착 등 주요 공정에서도 비슷한 면이 많고 오히려 더 쉬운 부분도 있죠. 태양전지 시장 초창기 샤프나 교세라 등 일본 유명 반도체 제조사들이 이 사업에 선구적으로 뛰어든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향후 태양전지 시장이 매년 큰 폭으로 성장할 것이란 기대도 깔려있었습니다. 주성엔지니어링이 태양전지 사업에 뛰어든 2006년 당시 사업보고서를 보면 2005년부터 2010년까지 관련 시장이 연평균 27% 성장할 것이란 전망이 적혀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도 정책적으로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리는 추세이니 미래 성장성이 있을 것이란 판단이 선 것으로 보입니다.

▲ 주성엔지니어링 태양전지 장비 부문 매출은 2010년대 초반까지 전체 매출의 절반에 가까이 이르기도 했지만 이후 그 비중이 급감했다.
▲ 주성엔지니어링 태양전지 장비 부문 매출은 2010년대 초반까지 전체 매출의 절반에 가까이 이르기도 했지만 이후 그 비중이 급감했다.

이렇게 시작한 주성엔지니어링의 태양전지 사업은 초반에 승승장구했습니다. 2007년 약 200억원, 2008년 약 500억원의 매출에 이어 2009년 약 700억원, 2010년에 무려 1883억원을 기록하며 기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매출을 뛰어넘기도 했죠. 다만 2011년 1455억원으로 기세가 꺾인 뒤 글로벌 금융 위기가 불어닥친 2012년 무려 156억원으로 매출이 크게 급감합니다. 

이때 한 차례 타격을 입은 주성엔지니어링은 본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로 사업을 재편했습니다. 태양전지 장비 매출은 2010년대 100~200억원대에서 맴돌다 2017년 74억원, 2018년 19억원에 이어 2019년과 2020년은 각각 5억원과 3억원으로 한 자릿수대로 떨어졌죠. 지난해까지 주성엔지니어링의 태양전지 사업은 명맥만 남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태양전지 관련 실적이 떨어진 이후에도 업계에선 주성엔지니어링이 태양광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던 게 사실입니다. 주성엔지니어링 측도 관련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었죠. 주성엔지니어링이 그간 태양전지 기술개발에 투자한 금액만 3000억원이 넘었다고 하합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대한 투자 와중에도 태양전지 투자를 꾸준히 이어온 결과 이번 기술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태양전지에 대한 주성엔지니어링의 투자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기도 합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성장 산업이긴 하나, 장비 공급사로선 고객사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지난해 본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실적이 크게 부진했던 것도 주요 고객사인 SK하이닉스와 LG디스플레이 등이 제품 수주를 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주성엔지니어링 실적은 반도체·디스플레이 고객사의 투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주성엔지니어링 실적은 반도체·디스플레이 고객사의 투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주성엔지니어링의 역사적 실적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2011년과 2020년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 투자 부진에 따라 영업손실이 발생했고, 매출이 궤도에 올랐던 2016~2019년에도 연 매출과 영업이익이 성장하진 못했습니다. 성장산업 생태계에 속해있더라도 사세를 키우기 어렵고 고객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시간과 돈이 들더라도 리더십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는 게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태양전지, ESG·탄소중립 트렌드와 함께 재도약할까
그런 면에서 주성엔지니어링의 새 태양전지 개발 소식은 분명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태양전지의 발전 전환효율은 1980년대 20%를 이룬 이후 현재까지 20% 중반대에 머물러있는데, 주성엔지니어링이 연구소 장비가 아니라 양산 장비를 통해 개발한 제품이 현존 최고 발전효율을 냈기 때문입니다.

그간 주춤했던 태양에너지 시장은 올해를 기점으로 지속 성장할 게 확실해 보입니다. 기업이 실질적 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탄소중립이 글로벌 기업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고, 여기에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탄소 국경세’도 2026년 도입이 예정됐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이제 제품 제조 과정(Scope1)뿐 아니라 생산에 쓰이는 전기(Scope2)도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에 따라 태양에너지를 찾는 기업들의 수요도 자연스럽게 많아질 겁니다.

▲ 한국의 그리드 패러티 시점은 세계 주요국과 비교해 크게 뒤쳐진다.(사진=딜로이트 안진 ‘한국기업들의 탈탄소 전환의 도전과 과제’)
▲ 한국의 그리드 패러티 시점은 세계 주요국과 비교해 크게 뒤쳐진다.(사진=딜로이트 안진 ‘한국기업들의 탈탄소 전환의 도전과 과제’)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역설적으로 태양광을 비롯한 신재생에너지 투자가 활발히 이뤄질 조건이 갖춰진 상태입니다. 미국과 중국, 인도 등 글로벌 주요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그리드 패러티(탄소 기반 에너지와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단가의 중립화)가 이뤄질 시점이 매우 늦습니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측면에서 '탄소중립'이 사실상 강제되는 오늘날, 우리나라도 관련 투자를 늦출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런 면에서 광발전의 핵심 장비로 분류되는 태양전지를 개발하는 주성엔지니어링이 수혜를 볼 가능성이 커집니다.

주성엔지니어링의 태양전지 사업은 밝았던 시작과 달리 2010년대부터 오랫동안 침체기를 거쳐왔습니다. 그럼에도 투자를 이어온 건 단순히 완성된 현재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불투명한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해석됩니다. 신재생에너지 시장이 재도약을 시작하는 가운데 주성엔지니어링의 태양전지 사업은 앞으로도 꾸준히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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