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DB하이텍 부천공장. (사진=DB하이텍)
▲ DB하이텍 부천공장. (사진=DB하이텍)

파운드리 업체 DB하이텍이 매각설에 휩싸였습니다. <매일경제신문>은 12일 “DB그룹이 반도체 파운드리 전문업체인 자회사 DB하이텍 매각을 추진한다”고 보도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 지분 등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 17.3%를 매각한다는 내용이죠.

DB그룹은 최초 보도 4시간 만에 “매각 추진 진행 중이지 않다”고 공시했습니다. 기사가 새벽에 보도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빠르게 대응한 거죠. 거래소 조회공시 요구를 받기도 전 직접 반박한 겁니다.

발 빠른 대응에 나선 이유는 매각 계획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논란 자체가 부담스럽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DB하이텍은 DB그룹에서 ‘캐시카우’이기도 하고요. 오너 일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 겪어온 주요 계열사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DB그룹 변화의 중심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죠.

DB하이텍이 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스토리를 살펴보면, DB그룹이 매각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한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겠죠.

제조업 타이틀 떼야 하는 DB그룹
DB그룹은 2가지 부문으로 나뉩니다. 반도체 등 제조업 부문과 보험 등 금융업 부문이죠. DB그룹은 제조업 부문은 실질적 지주사 역할을 하는 DB inc.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계열사 DB하이텍과 DB메탈 등이 있는 구조죠.

DB하이텍은 캐시카우 계열사로 불립니다.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계열사’라는 의미인데요. 2015년부터 6년 연속 10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영업이익 2000억원대를 기록했죠.

▲ DB하이텍 실적 추이. 올해 상반기에는 매출액 5184억원, 영업이익 1420억원을 기록했다. (자료=DB하이텍 사업보고서)
▲ DB하이텍 실적 추이. 올해 상반기에는 매출액 5184억원, 영업이익 1420억원을 기록했다. (자료=DB하이텍 사업보고서)

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커졌습니다. 지난해 말 기준 DB그룹 계열사는 국내 20개, 해외 8개인데요. 이중 주요 계열사 6곳(DB Inc.·DB하이텍·DB손해보험·DB금융투자·DB캐피탈·DB생명보험) 실적을 살펴봤습니다.

이들의 별도 기준 영업이익 합계는 1조754억원인데요. 이중 DB하이텍이 차지하는 비중은 22.2%에 달합니다. 2015년 16.4%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거죠. 수익성만 놓고 보면 DB손해보험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그룹에 행사하고 있습니다.

DB하이텍은 그룹 내 다른 계열사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요. DB하이텍은 DB메탈의 ‘채권금융기관 공동관리절차(워크아웃)’ 진행을 위해 담보제공했죠. 올해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워크아웃이 종결되면서 담보제공은 끝났습니다. 이외에도 DB Inc.에 브랜드 사용 수수료를 지급하고 있죠.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DB하이텍은 DB Inc.에 81억원의 수수료를 지급했습니다. 

▲ 김남호 DB그룹 회장. (사진=DB하이텍 홈페이지)
▲ 김남호 DB그룹 회장. (사진=DB하이텍 홈페이지)

만약 DB하이텍이 DB그룹에서 매각된다면 DB그룹은 ‘제조업 부문’ 타이틀을 내려놔야 합니다. 오롯이 DB손해보험을 중심으로 한 금융그룹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 겁니다. 다만 올해 초 김남호 DB그룹 회장이 신년사에서 애정을 드러냈음을 고려하면 제조업 부문을 포기할 생각은 커보이지 않습니다.

김 회장은 “DB하이텍 등이 탁월한 성과를 창출한 것처럼 2021년에는 모든 계열사들이 경쟁력을 높여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시기 바란다. DB하이텍 영업이익률은 코스피 상장기업들 중 최선두권”이라고 칭찬했죠. 또 “DB그룹은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IT와 반도체 사업 역량을 모두 보유했다”며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변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안목 틀리지 않았다’ 드디어 증명했는데..
DB하이텍은 처음부터 호실적을 내 DB그룹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계열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DB그룹의 아픈 과거엔 DB하이텍이 있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DB그룹 오너 일가가 DB하이텍에 갖고 있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은 1969년 자본금 2500만원으로 미륭건설(동부건설)을 설립하고 동부그룹(DB그룹)을 키웠습니다. DB그룹은 1970년대 ‘중동 붐’을 타고 급성장했습니다. 창업 20년 만에 20대 기업까지 진입했죠.

돈이 생긴 DB그룹은 새 먹거리를 찾아 나섰죠. 그때 김 전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게 ‘반도체 제조업’입니다. 1997년 동부전자를 설립하죠. 하지만 IBM 계약 무산, IT 버블 등으로 매출은 바닥을 쳤습니다.

그럼에도 김 전 회장은 반도체 투자를 이어갑니다. 2002년 아남반도체를 인수합니다. 인수 비용은 1740억원, 상당한 규모의 딜이죠. 2004년엔 동부전자와 아남반도체를 합병해 동부아남반도체를 출범시키죠. 이렇게 만들어진 동부아남반도체가 바로 DB하이텍의 전신입니다.

반도체 투자는 결국 DB그룹 발목을 잡았습니다. 반도체 사업에는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했는데요. DB그룹은 외부 자금으로 이를 조달했습니다. 차입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적자가 지속돼 재무상태는 악화했죠. 더군다나 철강사업에서도 문제가 생기면서 다른 계열사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는데요.

결국 DB그룹은 2013년 11월 주요 자산과 계열사를 매각합니다. 자구계획엔 △동부인천스틸 △동부특수강 △동부발전당진 △동부익스프레스 △동부하이텍 △동부메탈 △동부당진항만 등 계열사 매각과 김 전 회장의 1000억원대 사재 출연 등이 담겼죠. 이 중 시장에서 저평가된 동부하이텍(DB하이텍)과 동부메탈 등 일부 계열사의 매각은 불발됐습니다.

DB그룹의 미운 오리가 된 DB하이텍은 2015년부터 반도체 업계 호황에 힘입어 반등합니다. 백조가 된 거죠. 김 전 회장 등 오너일가 입장에선 늦게나마 본인들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셈입니다.

DB하이텍은 올해에도 좋은 실적을 내고 있습니다. 거의 풀 생산체제를 유지하고 있죠. 올해 상반기 매출액 5184억원, 영업이익 142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전년 동기 대비 13.6%, 0.1% 증가한 수치입니다.

기업의 속내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당장 터진 매각설엔 반박했지만 실제로는 매각 작업을 진행할 수도 있고, 고민해 볼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겠죠. 다만 매각 사례들을 보면 ‘확실한 이유’를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DB그룹이 DB하이텍을 매각해야 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까요? 매각설이 한번 언급된 만큼 계속해서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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