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주목할 만한 블록체인 프로젝트나 업계 트렌드를 알기 쉽게 풀어봅니다.
요즘 가상자산(암호화폐) 거래소들은 특금법 시행령에 규정된 사업자 신고 준비로 골치가 아픕니다. 마감 기한이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은행들은 여전히 실명 계좌 발급에 비협조적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래블룰(Trevel Rule)' 시스템을 조기에 갖추라고 요구하는 은행까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신고 수리를 앞두고 꼼꼼한 요건 준수를 요구하는 정부·은행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안해달라는 거래소들과의 마찰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트래블룰은 '자금이동 규칙'이라고도 부릅니다. 쉽게 말해 금융 시스템에서 자금이 오갈 때 중개자는 송금인 A와 수신인 B의 신원 정보를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죠. 이는 불법 자금세탁을 막고 추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세계 은행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표준화된 트래블룰을 마련하고 공통된 시스템 아래 관련 업무를 처리해왔습니다. 또 가상자산 역시 일종의 화폐, 재산적 가치를 지닌 징표이므로 정부는 지난해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권고를 받아들여 특금법 개정안에 가상자산사업자(VASP)가 지켜야 할 의무 중 하나로 트래블룰을 명시했죠.

해당 내용에 따르면 거래소들은 100만원 이상의 가상자산 송금, 수취가 발생할 경우 송금인과 수취인 양측의 성명, 거래에 사용된 지갑 주소, 만약 해외송금일 경우 송금인의 주소와 주민등록번호까지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것이라니 얼핏 봐선 당연해 보이지만 문제는 일반 은행 시스템과 다른 블록체인의 가상자산 거래 구조에 있습니다.

콩가루처럼 난립한 거래소…트래블룰 표준 마련 쉽지 않다
가상자산 발행과 유통의 기본이 되는 블록체인은 기본적으로 익명성을 갖습니다. 일종의 통장 개념인 '가상자산 지갑'은 은행에서 계좌를 열 때와 달리 개설 시점에 신원 정보를 받지 않고 지갑 주소(계좌번호)로만 사용자를 구분합니다. 이 때문에 지갑 대 지갑 거래에서는 상대방이 신원을 밝히지 않는 이상 알아낼 수 없습니다.

▲ 블록체인 내 가상자산 이동은 이처럼 기본적으로 익명성을 띈다 (자료=이더스캔 갈무리)
▲ 블록체인 내 가상자산 이동은 이처럼 기본적으로 익명성을 띈다 (자료=이더스캔 갈무리)

다만 가상자산거래소를 통할 경우 회원가입 시점에 이용자의 기본 인적사항을 확인하므로 자사 회원에 한해 신원 확인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타 거래소 회원의 정보까진 알 방법이 없는데 트래블룰은 수취인에 대한 정보까지 송금하는 거래소가 알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거죠.

결국 트래블룰을 준수하려면 전세계 가상자산 거래소가 상호간 회원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표준 트래블룰 규칙, 시스템 등을 공동 구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현재 민간 사업자인 각 거래소간 연결고리가 그리 끈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내만 하더라도 60여곳의 거래소가 존재하지만 이들을 법적 테두리 안에 연결할 업권법이 부재한 상황이고 난립한 거래소들의 입장과 운영 방향성을 하나로 끌어갈 만큼의 영향력 있는 협회도 없다는 점에서 표준 트래블룰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트래블룰 조기 구축 요구한 농협…은행도 여유 없어
물론 정부도 이런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업 신고는 특금법 시행 6개월 뒤인 9월24일까지 하도록 하되 트래블룰 시행은 내년 3월까지 반년의 유예를 더 주기로 했는데요. 업계에 따르면 이달 초 농협은행이 실명계좌 제휴를 맺은 빗썸, 코인원에 트래블룰 도입 전까지 '가상자산 입출금 일시적 중단'을 제안하면서 해당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오른 상황입니다.

사실 지금은 특금법 사업 신고를 앞두고 은행들도 적잖은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무부처인 금융위가 거래소 실명계좌 발급에 대해 은행이 직접 거래소의 위험성을 평가할 것을 주문한 데다가 계좌 발급 후 거래소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면책권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트래블룰은 사업 신고보다 훨씬 이후까지 구축 여유가 남아 있는데 일단 실명계좌를 발급한 직후 내년 3월까지 트래블룰과 관련해 거래소에서 모종의 사고가 발생한다면 이 또한 은행 입장에선 난감한 상황이 됩니다.

▲ 케이뱅크는 업비트, 농협은 빗썸과 코인원, 신한은행은 코빗과 실명계좌 발급 계약을 맺고 있다 (이미지=각사)
▲ 케이뱅크는 업비트, 농협은 빗썸과 코인원, 신한은행은 코빗과 실명계좌 발급 계약을 맺고 있다 (이미지=각사)

현재 은행이 거래소와 제휴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실명계좌 발급에 따른 일부 수수료 정도입니다. 다만 업비트 수준의 대형 거래소가 아닌 이상 거래소와 제휴로 얻는 수수료는 은행 매출과 비교해 적은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은행도 철저한 리스크 관리가 필요한 민간 기업의 입장에서 굳이 작은 이익을 위해 시한폭탄을 품에 안을 필요는 없는 상황인 겁니다.

거래소들도 할 말이 있습니다. 만약 트래블룰 시스템 구축까지 거래소 내부 가두리 거래만 가능해질 경우 시세 조작이 쉬워지고 거래소별 시세 편차가 커져 시장이 혼란해질 수 있다는 건데요. 이를 강력하게 항의할 수 없는 건 아직까지 은행이 실명계좌란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황 변화를 위한 물밑 교섭을 벌이는 한편 타 은행들로 이 같은 요구가 확대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물론 거래소들이 손가락만 물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자구책 마련을 위해 지난 6월 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등 4대 거래소가 손잡고 트래블룰 시스템 개발을 위한 합작법인(JV)을 출범 한 바 있습니다. 이는 국내 핵심 거래소들이 함께 공동 트래블룰 솔루션을 마련에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국내 트래블룰 표준화에 대한 새 전기가 만들어질 사건으로 주목받았죠.

▲ (왼쪽부터) 이종구 한국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장, 이석우 두나무 대표, 허백영 빗썸코리아 대표, 오갑수 한국블록체인협회장, 오세진 코빗 대표, 차명훈 코인원 대표, 전중훤 한국블록체인협회 글로벌협력위원장 (사진=4대 거래소)
▲ (왼쪽부터) 이종구 한국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장, 이석우 두나무 대표, 허백영 빗썸코리아 대표, 오갑수 한국블록체인협회장, 오세진 코빗 대표, 차명훈 코인원 대표, 전중훤 한국블록체인협회 글로벌협력위원장 (사진=4대 거래소)

그러나 불과 한 달 뒤인 7월 말 업비트가 JV 탈퇴를 선언하고 자회사인 람다256을 통한 자체 트래블룰 솔루션 개발에 나서면서 JV도 처음과 같은 영향력을 갖긴 어렵게 됐습니다. 같은 4대 거래소라도 현재 국내에선 업비트 점유율이 약 70~80%에 이를 정도로 높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업비트는 지난 20일 국내 거래소 중 가장 먼저 가상자산사업자 신고를 마쳤다고 밝혔는데요. 코인원과 빗썸이 농협의 제지로 주춤하는 사이 업비트는 확률상 가장 먼저 사업자 신고를 수리 받고 본격적인 사업 확대에 날개를 펼게 될 전망입니다. 

평행선 달리는 트래블룰 논란, 누가 양보할까
지금의 복잡한 상황 타개를 위해선 최소한 규제처가 한발 더 양보하거나 거래소 업계가 보다 적극적으로 힘을 합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트래블룰은 개인 간 익명 거래에 대해서는 기술적으로 적용이 불가능한 사안이라 거래소를 틀어막는다고 해도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한데요. 이를 감안해 FATF나 정부도 트래블룰 이행 조건을 다소 완화해주는 안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거래소들 역시 무조건 '어렵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익은 잠시 접어두고 시장 존속을 위한 대승적 협력에 나설 필요가 있겠죠. 아직까진 서로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는 모습이지만 신고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어느 쪽이 백기를 들지는 수주 안에 윤곽이 드러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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