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환송심을 통해 수감됐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되면서 다양한 경영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M&A) 단행 가능성은 가장 자주 언급되고 있죠. 사실 이 시나리오는 괜한 이야기가 아니라 삼성전자에서 일찌감치 제시한 것들입니다.

▲ (사진=삼성전자)
▲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고는?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컨퍼런스콜에서 쌓이는 돈과 관련해 유의미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지난 정책 기간 M&A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해 보유 현금이 증가한 게 사실이며, 지속적 현금 증가는 회사 경영에 있어 부담된다는 겁니다. 이에 향후 3년 내 의미 있는 규모의 M&A를 단행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2분기 컨퍼런스콜에선 인공지능, 5G, 전장 사업등을 포함해 M&A 가능 분야를 거론하기도 했죠.

삼성전자의 이런 코맨트는 크게 두 가지 질문을 상기시킵니다. 삼성전자는 돈이 얼마나 있으며 어느 수준의 기업까지 M&A 할 수 있냐는 게 첫 번째고요. 쌓여가는 돈이 어떻게 ‘회사 경영에 부담’이 되는지가 두 번째입니다.

삼성전자가 분기 보고서를 낼 때마다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게 바로 현금성 자산입니다. 재무제표상 현금성 자산은 회사의 보유 현금과 3개월 내 현금화할 수 있는 단기금융상품을 합친 말인데요. 삼성전자의 연결 기준 현금성 자산은 지난 10여년 사이 약 4.2배 늘었습니다. 2011년 25조7000억원에서 2021년 상반기 기준 108조5000억원까지 증가했죠. 매해 달라진 배당 정책이나 M&A 상황에 따라 현금성 자산이 줄어드는 일도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 봤을 땐 우상향했다고 봐도 됩니다. 

다만 별도 기준으로 보면 이 숫자는 크게 줄어들며 또한 정체 중입니다. 연결 기준으로는 삼성디스플레이, 세메스, 삼성전자판매 등 국내 계열사뿐 아니라 해외법인을 포함해 총 237개 기업들이 포함되는데, 별도 기준은 이들을 뺀 본사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의 별도 현금성 자산은 지난 상반기 기준 17조1000억원 수준으로, 삼성전자 본사가 가진 돈이라 보면 됩니다.

국내 계열사 중 가장 규모가 큰 삼성디스플레이의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18조5000억원이었고 나머지의 현금 보유고는 미미한 수준입니다. 삼성전자의 연결 재무제표에서 삼성디스플레이 몫의 현금성 자산을 빼면 삼성전자 본사와 국외법인들의 현금 규모가 계산되죠. 여기서 상반기 기준 약 15조원에 달하는 차입금도 제외하면 대략적인 순현금 윤곽이 잡힙니다. 약 75조원 수준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쌓이는 돈은 왜 ‘리스크’일까?
그렇다면 쌓이는 돈은 왜 부담 요인일까요. 회사 실적이 오랫동안 개선되지도 않으면서 주주 친화 정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 때문입니다.

▲ 2013~2020년 삼성전자 사업부별 매출 추이.(자료=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 2013~2020년 삼성전자 사업부별 매출 추이.(자료=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실적 관점에서 삼성전자는 2013년부터 2020년까지 8년간 매출이 256조4000억원에서 260조원으로 단 4조4000억원 늘어나는 데 그쳤습니다. 사업부별로는 반도체(DS) 부문만 37조4000억원에서 72조9000억원으로 약 두 배 뛰었고요. 반면 디스플레이(DP) 부문은 29조8000억원에서 30조6000억원으로 제자리 걸음했습니다. 2017년 야심차게 인수했던 하만은 인수 첫해 7조원에서 지난해 9조원으로 큰 두각을 내지 못했죠.

모바일(IM)과 소비자가전(CE) 부문은 오히려 역성장 중입니다. 소비자가전은 2013년 매출 50조3000억원에서 2020년 48조2000억원으로 2조1000억원 줄었고, 같은 기간 모바일은 138조8000억원에서 99조6000억원으로 무려 39조2000억원이나 감소했습니다. 모바일 부문의 경우 매출이 100조원 아래로 떨어지자 올해 들어 전사 차원에서의 경영 진단이 진행됐고, 최근엔 IM과 CE 두 부문에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는 기사도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주주 친화 정책을 아주 적극적으로 펴지도 않았습니다. 본사 보유 현금에 대해 2017년 이후 배당만 늘렸을 뿐 국외법인에 있는 수십조원의 돈은 그대로 쌓아놨고요. 그렇다고 주주들의 요구대로 곳간에 쌓인 돈으로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지도 않았죠. 일부 주주들은 삼성전자에 공매도가 강한 이유 중 하나로 자사주 매입, 소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쌓인 현금이 리스크가 된 건 주가로 드러납니다. 지난해 코로나19 확산으로 글로벌 테크 기업의 주가가 서너 배 이상 뛴 곳들이 허다하지만 삼성전자 주가는 약 두 배가량 오르는 데 그쳤죠.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사업부문의 성장이 둔화되는 가운데 주주 친화 정책도 약한 데 대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 삼성전자 2021년 상반기 시설투자 추이.(자료=삼성전자 2021년 상반기보고서)
▲ 삼성전자 2021년 상반기 시설투자 추이.(자료=삼성전자 2021년 상반기보고서)

삼성전자는 리스크에 대처하기 위해 투자를 통해 수익성을 늘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구체적으론 가전이나 모바일은 사실상 성숙기에 속한 관계로 투자이익률(ROI)이 높진 않으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전장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이죠. 실제로 지난 상반기 삼성전자는 시설투자에 23조3000억원을 썼는데 이 가운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라인 신설과 증설, 보완에 쓰인 돈만 22조3000억원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가 하겠다는 게 바로 M&A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75조원에 달하는 현금성 자산이 ‘실탄’이 될 겁니다. 물론 현재 미국에서의 대규모 투자를 앞두고 있는 만큼 가진 돈을 모두 쓰긴 어렵지만, 재무건전성이 좋아 수십조원의 차입도 일으킬 수 있는 만큼 반도체 산업 역사에 기록될 만한 M&A를 단행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옵니다.
 

▲ 2010~2020년 반도체 업계 인수합병 규모 추이.(자료=IC인사이트)
▲ 2010~2020년 반도체 업계 인수합병 규모 추이.(자료=IC인사이트)

실제로 코로나19 이후 반도체 업계에는 수 건의 ‘빅 딜’이 터졌는데요. 엔비디아의 ARM 인수(400억 달러), AMD의 자일링스 인수(350억 달러), 아날로그디바이스의 맥심인터그레이티드 인수(209억 달러),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90억 달러) 등이 있죠.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트 자료를 인용하면 반도체 업계를 통틀어 지난해 M&A 규모는 1180억 달러로 2015년 최대치였던 1077억 달러보다도 많았습니다.

반면 M&A설이 모락모락하던 삼성전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특히 ARM이 엔비디아에 인수될 당시엔 세간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로 삼성전자가 손발이 묶인 게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룹 오너가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삼성전자가 어떻게 M&A를 단행할 수 있겠냐는 맥락입니다.

삼성전자의 M&A, 이재용 부회장 거취와 무관해야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블로터 DB)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블로터 DB)

다만 이 문제는 분명히 ‘선 긋기’가 필요합니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부회장 직함을 달고 있지만 엄밀히는 미등기 이사로 법적으로 회사 경영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에 제한이 있습니다. 이사회를 버젓이 두고 있음에도 오너의 거취로 인해 삼성전자가 M&A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 논리는, 반대로 말해 이 부회장이 혹여 다시 수감될 경우 의사결정을 하지 못한다는 걸 뜻합니다. 이 같은 현실은 글로벌 스탠다드 대비 우리나라 경영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역설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이 부회장이 있든 없든 삼성전자의 M&A는 ‘필연적’이어야만 합니다.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공언했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 M&A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재판은 물론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재판에도 피고로 올라와있는데요. 설령 오너가 부재하더라도 삼성전자가 M&A를 단행한다면 경영에 문제가 없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주게 돼 삼성전자의 저평가된 주가에도 긍정적 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한때 리더십을 차지했던 삼성전자는 오늘날 명백하게 도전받고 있습니다. 인텔은 ‘IDM 2.0’이란 이름으로 파운드리 산업 진출을 선언했고,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로 메모리 사업을 확대함은 물론 파운드리 투자도 준비 중이죠. 파운드리 업계 1위인 TSMC는 미국과 일본에 공장을 짓고 생산력을 더욱 확대할 계획입니다. 더 치열해지는 반도체 경쟁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삼성전자에 '오너 리스크'가 가장 큰 리스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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