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합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배터리, 인공지능, 통신, 바이오 등에 향후 3년간 240조원(해외 60조원 포함)을 투자하며, 더불어 통상의 채용 계획상 고용 규모인 ‘3년간 3만 명’에서 1만 명 늘린 4만 명을 뽑겠다는 겁니다.

삼성의 투자 계획에는 크게 ‘위기 극복’과 ‘보국’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읽힙니다. 삼성이 직접 밝힌 이번 투자 배경을 보면, 경제적으론 ‘새로운 미래 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하며 ‘반도체를 둘러싼 국가 간 패권 경쟁’이 거세지고 있어 이에 대응해야 하고, 사회적으론 양극화가 심해지고 평등과 공정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갖춰지는 가운데 ‘삼성에 대한 국민적인 기대와 바람’에 부응해야 한다는 겁니다.

▲ 이재용(왼쪽 두 번째)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평택 P3 건설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사진=삼성전자)
▲ 이재용(왼쪽 두 번째)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평택 P3 건설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사진=삼성전자)

‘기시감’ 드는 삼성의 대규모 투자
삼성의 이 같은 발표는 왠지 기시감이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딱 3년 전인 2018년 8월에도 삼성은 비슷한 자료를 냈습니다. 당시 그룹은 신규 투자 180조원과 4만 명 채용을 공언한 바 있습니다. 투자 규모만 60조원 가량 늘었고 투자 내용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통신, 바이오 등으로 대략 비슷하죠.

삼성은 이 발표를 기점으로 장기 투자에 따른 투자액과 고용을 강조하는 보도자료를 자주 내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위에 등극하기 위해 총 180조원을 투자하고 1만5000명을 채용한다고 밝혔고요. 지난해에는 2018년 180조원 투자 발표 이후 2년 만에 국내 투자만 130조원을 돌파했다고 강조했죠.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도 2019년 10월 퀀텀닷(QD) 디스플레이에 총 13조1000억원 투자 계획을 알렸습니다.

▲ 삼성은 2018년에도 3년 간 180조원 투자와 4만 명 채용 등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사진=삼성전자 뉴스룸 갈무리)
▲ 삼성은 2018년에도 3년 간 180조원 투자와 4만 명 채용 등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사진=삼성전자 뉴스룸 갈무리)

재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연간 단위가 아닌 분기, 반기 단위로 투자 계획을 세운다고 합니다. 반도체 업황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만큼 이에 대응하기에 1년짜리 계획으론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삼성이 3년 단위의 계획을 발표하며 180조원, 24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액수를 앞세우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뜻을 알기 위해선 삼성이 기존에 얼마만큼 투자를 단행했는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삼성의 투자액 가운데 세부 내용을 추정하긴 쉽지 않은데요. 다만 가장 규모가 큰 시설투자와 연구개발, 지분투자 등은 계열사별로 사업보고서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투자와 가장 연관이 있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투자액을 통해 그간의 투자 추이를 살펴봤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삼성전자의 2018~2020년 시설투자와 연구개발, 지분투자는 총 155조2144억원으로 집계됩니다. 2018년 48조1106억원, 2019년 47조1289억원, 2020년 59조9749억원을 집행했죠.

시설투자는 주로 공장과 라인 건설, 증설, 장비 투입, 보수 등에 집중됩니다. 삼성전자는 전세계적으로 한국(66곳)을 포함해 중국(10곳), 동남아시아(7곳), 유럽(3곳), 일본(1곳), 중동(1곳), 아프리카(2곳), CIS(독립국가연합·1곳) 등에 생산 거점을 두고 있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각종 가전제품과 부품 등이 만들어집니다.

세간에는 삼성전자의 투자에 대해 보통 시설투자만 주목하지만, 사실 연구개발 규모도 시설투자 대비 3분의 2 수준에 달합니다. 3계층의 연구개발 조직들에서 매년 만들어지는 특허만 1만5000여 건에 이르죠. 여기에 지난해부턴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기술 기업에 지분 투자한 액수도 큰 폭으로 늘었습니다.

삼성전자의 올해 상반기 투자액은 34조3530억원으로 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연구개발비는 10조9941억원으로 전년 대비 소폭 증가했지만 시설 투자에만 60.5%에 해당하는 23조3060억원을 집행했는데요. 상반기 투자액을 연간 기준으로 환산하면 70조원에 육박하게 되며, 이같은 투자가 3년간 이어진다면 삼성이 공언한 240조원 투자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성이 ‘제2의 반도체’로 키우겠다는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 3년간 총 6237억원을 시설, R&D 등에 투자했습니다. 세계 1위 규모의 3공장을 준공하면서 2018년 2475억원을 집행했고, 2019년과 2020년 각각 1788억원, 2064억원을 시설투자와 연구개발에 썼죠.

삼성전기는 어떨까요. 2018~2020년 투자액은 4조6142억원으로 삼성바이오로직스보다 많았습니다. 다만 2018년 1조7350억원에서 2019년 1조6756억원, 2020년 1조2036억원으로 투자액이 점점 줄어드는 게 눈에 띄는데요. 올해 상반기에는 6579억원을 집행했고, 현재 반도체용 패키지기판 증설도 진행 중인 만큼 투자액이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3년 240조원, 삼성에겐 ‘어차피 해야 할 투자’

반도체, 바이오 등과 관련된 세 계열사의 2018~2020년 시설투자, R&D, 지분투자 등을 합치면 약 160조원에 달합니다. 다만 삼성은 이 3년간 180조원의 신규 투자를 완료했다고 밝혔으니 약 20조원의 괴리가 있는데요. 삼성전자 측에 지난 3년 간 어떤 투자를 단행한 것인지 물어봤지만 삼성전자 관계자는 “계열사 전체의 신규투자액에 해당한다”며 “세부 내용은 대외비라 알려줄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은 240조원의 투자를 어떤 식으로 채울까요. 절대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투자 확대가 당장 그려집니다. 삼성전자는 미국에 제2의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 위해 부지를 선정하고 있는데요. 파운드리 라인인 평택 P2에 들인 돈만 30조원에 달하니 미국에 지을 공장은 최소한 이보단 더 비쌀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시스템반도체에도 지난해 180조원 투자를 공언한 만큼 연평균 20조원 가량의 투자금을 집행해야겠죠.

예고한 M&A 또한 실제 단행되면 투자 목록에 포함될 겁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컨퍼런스콜에서 확보된 현금을 활용해 향후 3년 내 M&A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죠. 시스템반도체에서의 리더십 확보, 6G 투자와 인공지능 등 선행 기술 확보에 있어 가장 확실한 방법이 기업 인수인 만큼 여기에도 적잖이 돈을 쓸 것으로 보입니다.


▲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현재 짓고 있는 4공장은 물론 향후 5, 6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사진=삼성바이오로직스)
▲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현재 짓고 있는 4공장은 물론 향후 5, 6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사진=삼성바이오로직스)

향후 삼성바이오로직스 또한 투자를 늘릴 게 거의 확실시됩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올해 상반기에는 1593억원으로 2020년의 77.2%에 해당하는 액수를 기투자했는데, 이는 현재 짓고 있는 4공장 투자의 영향입니다. 공언한대로 5, 6공장도 추가로 짓기 시작한다면 삼성바이오로직스 또한 향후 투자액이 더욱 늘어날 겁니다.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삼성이 3년간 240조원이라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40조원’이라는 숫자가 엄청난 건 사실이지만, 삼성이 지난 3년간 계열사를 통해 기투자한 내용만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글로벌 기업들과 반도체, 디스플레이, 바이오 산업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에게 이 정도 투자는 통상적일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성장기에 있는 모든 산업이 그렇지만, 삼성이 영위하고 있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바이오 등은 특히 경쟁이 심한 업종에 속합니다. 다른 회사보다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걸 제품화할 수 있는 생산능력도 뒷받침돼야 하죠.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나보다 더 뛰어난 경쟁자에게 수주를 뺏기도 도태되기 십상입니다. 이들 사업을 영위하는 삼성의 계열사들에게 투자란 살아남기 위해 꼭 해야 할 ‘숙제’인 겁니다.

역대급 투자 발표에 이재용은 왜 감춰졌을까

▲ (사진=블로터DB)
▲ (사진=블로터DB)

그래서 이번 삼성의 발표는 다소 ‘보여주기식’이란 색깔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삼성은 지분 승계 과정에서 수차례 잡음이 벌어졌고 그 결과 오너가 두 차례 수감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죠. 삼성을 바라보는 국민 시각은 ‘국가 경제를 살리는 애국 기업’, 그리고 ‘불법 승계를 벌이고 노조를 탄압하는 집단’이란 프레임 속에 갇힌 게 사실입니다. 삼성으로서도 해야 할 투자를 보여줌으로써 우호적 여론을 형성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번 발표에서 또 하나 주지할 점은 그룹 총수인 이 부회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는 중대 발표를 할 때마다 전면에서 그 당위를 설명했던 고 이건희 회장의 행보와 다릅니다. 위기 때마다 늘 전면에 나서 세간에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남겼던 선대 회장과는 달리, 이 부회장은 광복절 특별 사면 이후 짧은 기간 어떠한 대외 행보도 하지 않았고 역대급 투자 발표에도 총수로서의 코맨트 하나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논란은 다소간 소모적 논쟁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삼성이 지금껏 각종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고용을 늘리며, 우리나라는 물론 인류의 삶을 편하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고, 인재를 발굴해 키우고, 전기전자 기업과 스타트업의 생태계를 강화해온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새로운 미래 질서의 재편 속에서 삼성이 이번 투자를 통해 ‘한국 경제와 우리 사회가 당면할 과제’를 풀겠다는 그들의 미션을 잘 수행해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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