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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반기 배터리 업계를 키워드로 정리하면 △화해(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이 10년간 지속된 법적 갈등 종료) △합작사 설립 △배터리 사업 분사(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 물적분할) △리콜(품질 논란) △내재화 등으로 요약됩니다.
• 삼성SDI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과 달리 수주 잔고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달까지 180조원, SK이노베이션은 130조원의 수주 잔고를 쌓았다고 공개하죠. 그런데 삼성SDI는 수주 잔고를 '극비'에 붙입니다.

▲ 왼쪽부터 전영현 삼성SDI 사장,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사진=각사)
▲ 왼쪽부터 전영현 삼성SDI 사장,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사진=각사)

올해 상반기는 '전기차 붐'에 걸맞게 배터리 산업도 정말 뜨거운 시기였습니다. 전기차 판매량은 매해 30%씩 성장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인데,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 산업도 급성장했습니다. 

국내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배터리 산업이 과열돼 있음을 알렸습니다. 지난 2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의 최종 판결을 전후로 대립은 절정으로 치달았죠. 결국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에 합의금 2조원(현금 1조원, 로열티 1조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갈등은 봉합됐습니다. 
  
이후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리콜 비용 합의가 있었고, GM과 포드는 각각 LG와 SK를 파트너로 선택했습니다. 합작공장 설립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현대차까지 LG에너지솔루션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합작공장을 건설하기로 했죠.

지난달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 사업 연구에 10년 간 15조원을 투자하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설비 투자와 별개로 투자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SK이노베이션은 2030년까지 캐파를 현재의 10배 이상 늘리기로 했고, 5년 동안 17조원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 GM과 LG에너지솔루션이 건설 중인 합작공장 얼티엄셀즈.(사진=GM)
▲ GM과 LG에너지솔루션이 건설 중인 합작공장 얼티엄셀즈.(사진=GM)

이렇듯 상반기 전지업계는 국내 업체 간 갈등이 해소되고, 합작공장 설립과 투자소식이 이어졌습니다. 상반기 배터리 업계의 소식을 키워드로 정리하면 △화해(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이 10년간 지속된 법적 갈등 종료) △합작사 설립 △배터리 사업 분사(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 물적분할) △리콜(품질 논란) △내재화 등으로 정리될 것 같습니다.

국내 전지업계는 올해 상반기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다사다난'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정중동'하는 배터리 업체가 있습니다. 바로 삼성SDI입니다.

삼성SDI는 올해 전지사업에서 역대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20년 넘게 배터리 사업에 투자만 했는데, '수확'할 시기가 도래한 거죠. 하지만 삼성SDI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해외 생산기지 설립을 묻는 질문에도 "늦지 않게 진행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LG와 SK가 자사의 배터리 사업을 홍보하는 모습과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삼성SDI는 배터리 사업의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관심이 덜해서일까요. 아니면 과열된 시장을 경계하는 것일까요. 삼성SDI가 경쟁사와 다르게 지나치게 조심스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지 3사 중 삼성SDI만 수주 잔고 '비공개'
삼성SDI는 올해 상반기 매출 6조2975억원, 영업이익 4283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 매출은 27.0%, 영업이익은 171.5% 증가했습니다. 삼성SDI의 올해 상반기 실적은 창사 이후 최대치입니다. 올해 상반기 매출은 2010년 상반기와 비교해 2.5배 늘었고, 영업이익은 2.8배 커졌습니다.

삼성SDI는 2011년 디스플레이 사업을 떼내면서 중대형 배터리와 소형 IT기기용 배터리에 전념했죠. 디스플레이 등의 소재를 생산하고 있는데, 사업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회사를 현재의 규모로 키운 건 배터리 사업의 공이 컸죠.

▲ (자료=금융감독원)
▲ (자료=금융감독원)

상반기 전체 매출에서 배터리 사업(에너지재료)이 차지하는 비중은 80.9%(5조998억원)에 달했습니다. 지난해 에너지 재료의 매출은 3조7160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74.9%를 차지했죠. 올해 상반기 에너지 재료의 영업이익은 2156억원(50.3%)을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상반기 에너지 재료 부문은 138억원의 손실을 냈습니다.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의 영업이익을 낸 건 2018년 상반기(1146억원) 이후 처음입니다. 과거 삼성SDI의 배터리 사업은 설비 투자 등으로 인해 수백억원, 수천억원의 적자를 내는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기차용 중대형 전지를 본격적으로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크게 증가했습니다.

배터리 사업은 수주 사업입니다. 배터리 업체와 전기차 업체는 전기차 신모델을 내놓기 이전부터 오랜 기간 테스트 과정을 거칩니다. 배터리의 안전성을 충분히 검사한 후 신차 개발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삼성SDI와 제조사는 오래 전부터 배터리 수주 절차를 진행했고, 기수주한 물량이 매출로 실현되면서 실적이 개선됐습니다. 갑작스럽게 전기차가 잘 팔려 삼성SDI의 주문량이 밀려들어 매출이 늘어난 게 아닙니다.

시장조사기관 SNE 리서치에 따르면 삼성SDI의 올해 상반기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은 5.8GWh를 기록했습니다. 올해 상반기 전 세계에서 178만대의 전기차가 팔렸는데, 이중 삼성SDI는 약 9만여대에 탑재할 분량의 배터리를 판매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SDI의 점유율은 5.6%로 5위를 기록했습니다.

▲ 업체별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자료=SNE 리서치)
▲ 업체별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자료=SNE 리서치)

지난해 상반기 삼성SDI의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은 2.8GWh였는데, 2배 이상 늘어났죠. 삼성SDI의 빠른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입니다.  

그런데 삼성SDI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과 달리 수주 잔고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달까지 180조원의 수주 잔고를 쌓았다고 밝혔습니다. SK이노베이션은 130조원의 수주 잔고를 쌓았다고 밝혔죠. 그런데 삼성SDI는 수주 잔고를 '극비'에 붙였습니다. 시장은 삼성SDI가 지난해 말까지 약 75조원 규모의 일감을 쌓았을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닙니다.

배터리 비즈니스 트렌드
• 상반기 글로벌 전기차 시장과 유럽 전기차 시장은 각각 158%, 137% 성장. 삼성SDI 등 배터리 업체의 수익성도 함께 호전
•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자동차용 연비규제 부활. 연비규제 재도입으로 내연기관 자동차 대비 전기차 시장의 고성장이 본격화된다는 전망이 많아짐

삼성SDI는 폭스바겐과 BMW, 스텔란티스 등에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2위의 점유율을 확보한 LG에너지솔루션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는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죠. 그런데 자사의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지표인 수주 잔고를 알리길 꺼리는 모습입니다.

이유는 수주 잔고가 알려질 경우 기수주한 물량을 모두 납품하는데 걸리는 기간을 추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터리 사업의 매출을 더욱 늘리려면 수주를 더 많이 해야 하고, 증설을 통해 물량을 가능한 빠르게 소화해야 합니다. 삼성SDI의 배터리 증설 계획도 유추할 수 있죠. 그런데 삼성SDI는 고객사의 수요에 대응해 증설 계획을 짜는 모습입니다.

증설도 합작사도 '시큰둥'...이유는 전지시장이 '세분화' 됐기 때문
삼성SDI는 중장기적인 투자 계획을 밝히는데는 소극적인 모습입니다. 올해 초 헝가리 공장에 9000억원을 투자해 각형 배터리 공장의 캐파를 현행 30GWh에서 50GWh 규모로 증설할 계획입니다.

삼성SDI는 천안과 중국 톈진, 말레이시아 세렘방에서 원통형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울산과 중국 시안, 헝가리 괴드에 전기차용 각형 배터리 생산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전기차용 배터리 캐파와 관련해 회사가 공개한 정확한 수치는 없습니다.

시장에서는 삼성SDI가 현재 약 50GWh 미만의 캐파를 확보했고, 2025년까지 100GWh까지 확대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은 2025년까지 약 200GWh 규모로, LG에너지솔루션은 430GWh 규모로 늘릴 계획이죠. 삼성SDI는 SK와 LG보다 증설에 다소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자료=삼성증권)
▲ (자료=삼성증권)

현재 삼성SDI는 미국에 첫번째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취임 후 전기차와 ESS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바이 아메리칸(연방정부는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우선 구매하는 정책)' 행정명령의 영향으로 현지 생산 현지 납품의 필요성이 커졌죠. LG와 SK는 미국에 경쟁적으로 생산기지를 짓고 있는데, 삼성SDI는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모습입니다.

전기차 제조사와 합작사를 설립하는 점에서도 삼성SDI는 다소 소극적입니다. LG와 SK는 각각 GM과 포드와 '혈맹'을 맺었습니다. 삼성SDI는 폭스바겐과 BMW 등과 납품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 모두 배터리를 직접 생산할 계획이죠. 현지에서는 삼성SDI가 리비안과 스텔란티스를 두고 어떤 업체와 합작공장을 설립할지 고심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고객사는 배터리의 수직계열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삼성SDI는 외부에서 보기에 다급해 보이지 않습니다.

▲ 테슬라가 지난해 배터리 데이서 발표한 46800 원통형 배터리
▲ 테슬라가 지난해 배터리 데이서 발표한 46800 원통형 배터리

삼성SDI가 다소 보수적인 전략을 짜는 건 전지시장이 '세분화'됐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9월 테슬라가 배터리 데이에서 '46800 원통형 전지' 생산 계획을 밝힌 이후 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올해 3월 폭스바겐이 '파워데이'에서 자사 전기차에 각형 배터리를 탑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렇듯 글로벌 빅1과 빅2는 자사의 전기차에 적합한 배터리의 표준을 마련했습니다.

배터리의 표준을 만드는 게 전지업체가 아닌 자동차 제조사라는 분위기가 굳어졌습니다. 삼성SDI는 각형 배터리를 '주포'로 준비하는 한편 원통형 배터리 기술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고객사를 다변화하기 위해서는 수요에 대응해 배터리 생산공장을 설립하는 게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배터리 시장은 고객사의 선호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BMW와 폭스바겐, 스텔란티스 등 유럽업체는 각형 배터리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테슬라는 원통형 배터리를 선호합니다. 중대형 원통형 배터리의 개발에 따라 글로벌 표준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 폭스바겐이 올해 3월 파워데이에서 각형 배터리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사진=폭스바겐)
▲ 폭스바겐이 올해 3월 파워데이에서 각형 배터리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사진=폭스바겐)

게다가 삼성SDI는 전고체 전지를 차세대 전지로 정하고 개발 중입니다. 미국 솔리드 파워(Solid Power)와 아이오닉 마테리얼스(Ionic Materials)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삼성SDI는 현대차와 함께 전고체 선행배터리 연구소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배터리 산업이 고객사를 중심으로 빠르게 세분화되고 있고, 차세대 전지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만큼 공격적으로 캐파를 늘리지 않고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전략을 택한 거죠.

삼성SDI가 경쟁사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과 달리 '조용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이유로 보입니다.

알아두면 좋은 지식들
폭스바겐 배터리 내재화 '폭탄선언' : 폭스바겐이 2021년 3월 17일 전기차에 대한 전략과 비전을 담은 ‘파워 데이’에서 2030년까지  자체 300GWh(기가와트시) 규모의 배터리 수요 중 240GWh를 직접 생산한 배터리로 조달할 계획이라고 한 발표입니다. 폭스바겐은 전기차 기준 글로벌 2위의 마켓셰어를 확보한 회사로, 테슬라와 함께 전기차 시장의 ‘맹주’이죠. 폭스바겐에 파우치형 배터리를 납품하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당시 제기됐으나 지금은 고객 다변화를 통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분석이 더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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