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사진=카카오)
▲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사진=카카오)

과거 회사의 위기마다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던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최근 불거진 '골목상권 침해 논란' 관련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카카오는 국민 모바일 플랫폼이 된 카카오톡을 중심으로 △택시 호출 △미용실 예약 △대리운전 등의 시장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하지만 이 분야는 주로 소상공인들이 이끌고 있는 시장들로 대기업인 카카오가 플랫폼 파워를 앞세워 골목상권을 침해했다는 논란이 이어졌다. 결국 국회도 나섰고 오는 10월 열리는 국정감사에서 김 의장은 정무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등에서 증인으로 채택됐다. 카카오는 △골목상권 논란 사업 철수 및 혁신 사업 중심으로 재편 △파트너 지원 확대를 위한 기금 5년간 3000억원 조성 △김 의장 소유의 케이큐브홀딩스, 사회적 가치 창출 집중 등을 골자로 한 상생방안을 내놓았지만 상세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카카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주가도 속절없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처럼 카카오의 사업 확장에 제동이 걸린 가운데 김 의장의 행보에 눈길이 모아지는 것은 그가 과거에 있었던 위기마다 승부사 기질을 보이며 회사를 일으켰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김 의장은 네이버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다. 네이버컴은 김 의장이 이끌던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이하 한게임)과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세운 네이버컴이 합병한 회사였다. 당시 트래픽을 보유한 한게임과 막강한 회원수를 기반으로 한 네이버컴이 하나의 회사가 된 것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그 속에서 김 의장이 추진한 것이 게임의 유료화다.

현재는 게임을 즐기며 결제를 하는 것이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게임은 무료로 즐긴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었다. 또 당시는 인터넷 거품 논란이 이어지면서 스타트업들이 줄도산하는 등 벤처 업계에 한파가 불어닥친 시기였다. 하지만 늘어나는 회원수를 감당하기 위한 서버 등 각종 인프라 유지보수 비용과 개발비를 감당하려면 유료화는 필수라는 것이 김 의장의 생각이었다. 그는 돈을 내고서라도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소비자들도 지갑을 열게 될 것이라고 봤다.

김 의장은 주변의 만류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2001년 3월 유료 한게임이 오픈했다. 우려와 달리 오픈 첫날 약 1억원의 결제금액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알리는 듯 했지만 이후 결제금액은 크게 줄었다. 김 의장은 실망하지 않고 2차 유료화도 진행했다. 한게임은 차츰 수익을 내는 모델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당시 국내 최대 채팅 사이트 세이클럽에서도 아바타를 유료화하는 등 유료화는 인터넷 및 게임 업계로 번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유료화를 시작하면 초반에는 결제금액이 몰리지만 이후에는 줄어든 후 다시 올라가는 것이 패턴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유료화가 처음이었던 당시에는 회사 입장에서도 모든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김 의장의 과감한 승부수가 먹힌 것이다.

김 의장의 승부사 기질은 그가 네이버를 떠나 새롭게 창업한 아이위랩(카카오 전신) 시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애플의 아이폰으로 시작될 스마트폰 시대에는 커뮤니케이션이 핵심 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관련 서비스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아이위랩이 만든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는 카카오아지트·카카오수다·카카오톡 등 세가지다. 이 서비스들은 동시에 애플의 앱스토어에 출시됐지만 한 달이 지나자 카카오톡이 가장 많은 다운로드 건수를 기록하며 먼저 치고 나갔다. 

카카오톡이 가능성을 보이자 김 의장은 카카오수다와 카카오아지트의 추가 개발을 중단하고 카카오톡에 회사의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경쟁 서비스들도 있는 가운데 만약 실패한다면 회사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위험이 따랐지만 김 의장은 카카오톡에 승부를 건 셈이다.

당시 유사한 서비스로는 해외 서비스인 왓츠앱과 국내 개발사가 만든 엠앤톡이 선발주자로 시장에 나와 있었다. 카카오톡은 후발주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유료화를 진행했던 왓츠앱과 달리 카카오톡은 무료 기반이었다. 또 서비스가 다소 불안했던 엠앤톡을 반면교사 삼아 김 의장은 카카오톡이 많은 양의 데이터도 감당할 수 있도록 서버를 철저히 준비했다. 이러한 차별화덕분에 카카오톡은 2010년 3월 출시 후 약 1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당시에는 애플의 앱스토어밖에 없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갤럭시S를 내놓으며 본격적인 안드로이드(구글의 모바일 운영체제) 기반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자 카카오톡도 급격히 성장했다. 이후 카카오톡은 게임·광고·쇼핑 등의 부가 서비스들을 추가하며 메신저에서 모바일 플랫폼으로 거듭났다.

김 의장의 승부사 기질이 매번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을 살피고 내린 중요한 결단은 결국 성공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최근 이어지고 있는 카카오에 대한 악화된 여론은 과거 창업 초기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 중론이다. 회사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고 카카오톡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됐다. 그만큼 회사에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도 커졌다. 계열사도 100개를 넘어섰다. 카카오의 창업자이자 최대주주인 김 의장이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사업적인 효율성을 꾀할 수 있는 묘수를 내놓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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