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주목할 만한 블록체인 프로젝트나 업계 트렌드를 알기 쉽게 풀어봅니다.
▲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비트코인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한 현장.(사진=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트위터)
▲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비트코인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한 현장.(사진=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트위터)

마블 코믹스 세계관에선 '와칸다'라는 국가가 있습니다. 최강의 희귀 금속 '비브라늄'의 매장지라는 이점으로 가난한 원시국가에 머무르지 않고 첨단 과학기술이 꽃피우게 됐죠. 태양열 같은 천연자원을 활용해 석유도 쓰지 않으니, 요소수 대란처럼 특정국의 수출 상황에 영향받지 않고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할 수 있었고요.

지난 9월부터 가상자산인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정한 엘살바도르는 와칸다를 꿈꾸는 것일까요?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20일(현지 시간) 중남미 비트코인·블록체인 콘퍼런스에 참석해 세계 최초의 '비트코인 도시'를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주거지, 상업시설, 박물관, 공항 등이 들어선 '진짜' 도시를요.

그의 구상에 따르면 이 비트코인 도시는 남부 태평양 연안의 콘차과 화산 인근에 조성됩니다. 지열 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은 도시 운영은 물론 비트코인 채굴에 활용됩니다. 여기서 벌어들인 소득은 10% 부가가치세를 제외하고 어떤 세금도 떼지 않는다고 합니다. 건설 자금은 내년 10억 달러(약 1조1900억원) 규모로 10년물 달러표시 비트코인 국채를 발행해 충당한다는 계획입니다.

재밌으면서도 나름의 근거를 담은 구상입니다. 아이슬란드나 뉴질랜드 등 화산폭발이 잦은 국가는 정해져 있죠. 지열발전은 그런 특수한 곳에서 가능한데, 앞서 언급한 국가는 이미 통화 및 금융시스템이 자리잡아 있죠. 엘살바도르처럼 비트코인의 법정통화 같은 급진적 정책을 쓰기엔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엘살바도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채굴업체들이 엘살바도르에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선 가상자산을 제도권 내로 편입하면서 세금을 걷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선 가상자산의 거래와 채굴 자체를 제한하고 있죠. 엘살바도르에선 호수를 온천으로 만들지 않고도 지열발전을 이용해 채굴이 가능합니다.

하이테크를 보유한 핀테크 업체들의 진출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핀테크 업체에 있어 가장 난관이 되는건 규제입니다. 좋은 기술을 개발해놓고도 제도가 허용하지 않아 무용한 경우가 많죠. 엘살바도르에 진출하면 국민들에게 송금, 지불 등 경제활동에 편의성을 제공하는 기술을 도입하고 실사례를 확보할 수도 있게 됩니다.

만약 비즈니스 생태계가 자리잡으면 엘살바도르 국민들의 생산성을 높일 기회도 많아질 것이고, 국부가 두터워질 수 있겠죠. 아일랜드는 12.5%의 법인세로 다국적기업을 대거 유치해 나라살림을 꾸렸는데, 10%의 부가가치세를 내건 엘살바도르도 비트코인 도시가 활성화된다면 빈국 탈출의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부켈레 대통령의 결정은 가시성 있는 정책보다는 리스크 있는 도박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비브라늄은 강철보다 가벼우면서 매우 견고해 캡틴 아메리카 방패도 만들 수 있는 귀한 물질이잖아요? 근데 비트코인은 엄밀히 따져서는 데이터이며, 그 자체로는 특별한 가치가 없습니다. 공정한 분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성으로써 가치가 형성되죠. 금보다 높은 비트코인의 변동성은 이 때문에 기인합니다.

당장 수중에 10원 한 장이 중요한 엘살바도르 국민들은 부켈레 대통령의 정책을 민생과 괴리됐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비트코인 입출금기의 대기줄에서 앞사람은 고점에 인출했는데, 그 뒤에 선 사이에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진다면 정말 억울하겠죠. 엘살바도르 경제사회개발원(FUSADES)이 9월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소비자의 87.9%가 비트코인으로 결제한 적이 없다고 답했으며, 기업의 93.1%는 비트코인 거래가 없었다고 응답했습니다.

주 엘살바도르 대한민국 대사관에 따르면 지난달 17일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5000명 추산의 시민과 노조, 시민단체, 법조인 등은 가두행진 후 구시가지 광장에 모여 부켈레 정부에 항의를 제기했다고 합니다. 지난 9월 15일 열린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이어 두 번째 대규모 시위입니다.

시위대의 주장 내용은 권위주의 체제 반대, 비트코인의 법정통화 폐지, 대법원의 대통령 재선허용 유권해석의 문제 등이었습니다. 시위대는 경찰이 산살바도르 시내 진입로 20곳에 설치한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고 되돌아 갔다고 하네요.

부켈레 대통령은 좀처럼 자기 생각을 바꿀 일이 없을 듯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대고 있죠.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함이 첫 번째입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부터 최근의 코로나19까지 미국은 달러를 대거 푸는 양적완화를 펼쳤죠. 미국은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고통을 세계와 나누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산업기반이 취약하고 통화를 달러에 의존하는 엘살바도르는 구매력이 약화되는 인플레이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고요.

또 엘살바도르는 경제의 상당부분을 이주민의 본국 송금액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막대한 송금 수수료를 비트코인을 통한 송금으로 절감할 수 있다는 게 엘살바도르 정부의 계산이죠. 이에 해외송금을 위해 정부 전자지갑 '치보'를 이용토록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정부가 거래내역을 살펴볼 수 있겠죠. 관공서에서 세금을 비트코인으로 징수할 수도 있고요.

엘살바도르는 이렇게 비트코인을 금융 시스템 구축부터 투자 유치까지 경제 재건을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하죠. 부켈레 대통령의 도박이 성공한다면, 높은 범죄율로 악명 높던 엘살바도르가 미국의 달러 패권에서 벗어난 혁신 국가로 탈바꿈하는 역사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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