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과 대우조선해양의 M&A가 1080일 만에 EU의 결정에 따라 사실상 무산됐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이번 M&A로 '빅3' 체제인 조선산업을 '빅2'로 줄여, 국내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더불어 M&A로 수주 경쟁력을 더욱 높여 디지털 전환 및 수소·암모니아 등 친환경 조선소로 전환을 가속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EU가 기업결합을 불허함에 따라 '퍼즐의 한조각'이 맞지 않게 됐다. '디지털 및 친환경' 조선소로 전환 중인 현대중공업그룹에 어떤 영향이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영향은 없다'.
▲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과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이 대우조선 인수에 서명했다.(사진=현대중공업그룹)
▲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과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이 대우조선 인수에 서명했다.(사진=현대중공업그룹)

1000일 넘게 진행된 기업결합 심사는 어떻게 '불승인(disapproval)'으로 결론났을까. 현대중공업그룹과 대우조선해양의 기업결합에 있어 총 3개의 '경우의 수'가 있었다. 첫째, 기업결합이 승인되거나 둘째, 조건부로 승인되거나 셋째, 불승인되거나 총 3개의 경우의 수가 예상됐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19년 7월 한국 공정거래위원회 기업결합을 신청했고, EU와 일본 등 5개국에 추가로 신청했다. EU는 현대중공업그룹 등 조선사의 고객사 다수가 포진해 있어 같은해 4월부터 협의를 진행했다. 만 2년 9개월 동안 EU에 공을 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13일 EU 공정위원회로부터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었다. EU는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그룹의 합병(기업결합)을 불허한다는 내용의 심사결과를 전달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다국적 로펌인 프레쉬필즈(Freshfields)의 자문을 받아 EU를 공략했다. 이번 기업결합이 LNG운반선 분야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의 점유율을 높여, 유럽 선사에 불이익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게 현대중공업그룹의 주장이었다. 심사 결과를 놓고 보면 EU의 우려를 달래기 충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U는 왜 반대했을까?
EU의 기업결합 심사는 '자국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지'를 가장 우선적으로 판단한다. 동종 사업에 종사하는 두 기업의 합병으로 경제력 집중(소수 기업이 생산과 공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상)이 발생해 자국 소비자가 불이익을 보는지를 가장 우선한다.

이번 기업결합 심사의 경우 소비자는 유럽 시민이 아닌 기업이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의 고객사는 해운사 또는 선사이다. 유럽은 세계 해운강국으로 글로벌 1~3위의 해운사가 모두 유럽 선사이다.

1위인 머스크(MAERSK)와 2위인 MSC, 3위인 CMA CGM 모두 유럽 선사이다. 글로벌 해운시장에서 3사의 점유율을 합하면 45.7%(올해 7월 기준)에 달한다. 이 때문에 EU에 있어 이번 기업결합은 우려스러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국내 조선업계는 전 세계에서 발주된 LNG선 물량을 쓸어담고 있다. 영국 클락슨리서치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LNG운반선은 지난해 78척이 발주됐는데, 국내 조선3사(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가 68척을 수주했다. LNG운반선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87%에 달하는 셈이다. 사실상 시장지배적 위치에 있다.

글로벌 조선시장에서 현대중공업 등 조선3사 외에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와 중국 후동조선소, 러시아 즈베즈다 조선소가 있는데, 지난해 후동조선소 외에는 수주 실적이 없었다.
 
대우조선해양이 현대중공업그룹에 편입될 경우 LNG선 점유율은 압도적으로 현대중공업에 쏠리게 된다. 현대중공업그룹의 LNG선 점유율이 약 70% 넘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현대중공업그룹 측에서는 각사가 개별적으로 입찰하는 점을 고려하면 시장 점유율을 단순히 시장 지배력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우조선해양이 한국조선해양의 계열사인 점과 입찰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도 현대중공업그룹의 주장은 모순된다.

이유는 이번 딜의 출발점이 EU의 우려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대우조선해양이 장기간 산업은행 산하에서 '공기업'처럼 운영되다 보니 조선시장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주장했다. 산은에서 내려보낸 경영진은 단기적인 경영성과와 재무성과에 집중하고 있어 이른바 '저가입찰'이 비일비재했다는 주장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대우조선해양을 떠안아서라도 시장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목적으로 이번 딜에 참여했다. 인수 구조는 현대중공업(상장사)을 물적분할해 중간지주사(한국조선해양)와 영업자회사(현대중공업)으로 나눈 후 중간지주사가 산업은행의 대우조선해양 지분(55.7%)를 인수하는 구조다. 약 2조1000억원의 비용으로 조선 2위인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하려고 했던 목적에 '발목'잡혀 인수가 불승인됐다. EU는 자국의 해운사들이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등 다수의 조선사와 LNG운반선의 가격 협상을 하길 희망했다.

EU의 반대...'협상'은 불가능했나
결론부터 EU와 현대중공업그룹이 서로 대척점에 있던 탓에 협상은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EU는 인수자인 현대중공업과 피인수자인 대우조선해양 중 한쪽이 LNG선 사업을 매각하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일정 기간 LNG선 가격을 동결하겠다고 제안했고, 선박 기술을 이전하겠다고 제안했다.

LNG선을 구조조정하는 것에 있어 EU와 현대중공업그룹은 평행선을 달렸다. EU의 제안은 사실상 수용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선박은 조선소의 도크에서 건조되는데, 선종을 구조조정하라는 것은 LNG선을 건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기준 대우조선해양의 수주 잔고 중 LNG운반선은 총 28척이다. 수주 잔고 중 24.1%에 달한다. 컨테이너선이 32척(27.5%)으로 가장 많다. 한국조선해양(현대중공업,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의 LNG운반선 수주 잔고는 65척이다. 전체 수주 잔고 359척 중 LNG운반선 비중은 18.1%다. 컨테이너선은 22.2%(80척)로 가장 많다.

대우조선해양의 LNG운반선 수주 비중이 한국조선해양보다 높다. 현대중공업그룹 입장에선 현대중공업이 LNG선을 포기하거나 대우조선해양이 LNG선을 포기하거나 양자택일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3분기 누적 매출 3조130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1.6%(2조2344억원) 줄었다. 영업손익은 적자 전환했는데, 누적 영업손실은 1조2393억원에 달했다. 적자가 3개 분기 만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LNG운반선은 여타 선종 중 가격이 가장 비싸다. 지난해 12월 LNG운반선의 선가는 2억1000만 달러(한화 2492억원)에 달한다. 컨테이너선 한척에 1억4800만 달러인데, LNG운반선은 가격이 41% 높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LNG운반선을 구조조정하면 경영정상화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기 위해 현대중공업의 LNG운반선을 구조조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빈대(저가 수주) 잡으려고 초가삼간(현대중공업의 고수익 사업)을 다 태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양자택일' 중 '지는 쪽'을 선택한 현대중공업그룹
EU의 요청을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은 물 밑에서 이번 인수의 필요성과 경제력 집중의 부정적 효과는 없다고 EU에 읍소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그룹은 글로벌 로펌인 프레쉬필즈와 경제분석 컨설팅 기업인 컴파스 렉시콘(Compass Lexecon)에서 자문을 받아 EU 공정위에 지난 2년간 설명했다.

△입찰 경쟁에 있어 특정 업체의 독점은 불가능한 점 △LNG운반선의 핵심인 화물창의 라이센스를 보유한 조선소는 30개에 달한다는 점 △싱가포르 경쟁위원회가 기업결합을 승인한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현대중공업그룹은 14일 보도자료를 통해 EU의 결정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EU 공정위가 싱가포르와 중국 공정위의 결정에 반하는 불허 결정을 내린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최종 결정문을 검토한 후 법적대응 등 대응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대중공업그룹과 대우조선해양의 이번 기업결합은 '올 오어 나씽(All or nothing)'의 구도였다. 기업결합 심사를 신청한 곳 중 한 곳이라도 불허할 경우 사실상 무산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그룹이 가처분 소송 등을 통해 EU의 결정을 '무효'로 돌리지 않는 한 이번 딜이 다시 속행될 가능성은 없다.

이번 기업결합 심사는 확률적으로 현대중공업그룹이 '불승인'을 받아들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지난 30년 동안 EU에 접수된 기업결합 심사(7311건) 중 92.8%(6785건)는 모두 1단계(일반심사)에서 승인됐다. EU의 판단에 따라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할 경우 2단계인 심층심사까지 진행된다. 심층심사에 올라간 224건의 사례 중 14.7%(33건)만 불승인됐고, 85.2%(191건)는 경제력 집중을 야기할 요건을 수정하는 조건으로 승인됐다.

확률적으로 현대중공업이 질 가능성은 없었지만, 현대중공업그룹은 'LNG선을 살리냐 없애냐'라는 양자택일의 구도에서 사실상 지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대우조선해양의 주인을 찾아주려는 산업은행의 노력은 2009년에 이어 2022년에도 물거품이 될 전망이다.

만약 이번 딜이 최종적으로 무산된다면 산업은행의 책임이 가장 크다. '스토킹호스(회생기업이 인수의향자와 공개입찰을 전제로 조건부 인수계약을 맺는 방식)', 사실상 수의계약으로 대우조선해양의 새 주인을 현대중공업그룹으로 낙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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