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버트 디스 폭스바겐그룹 CEO.
▲ 허버트 디스 폭스바겐그룹 CEO.

유럽에서 아시아 전지회사 의존을 줄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그동안 유럽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과 CATL 등에서 전지를 공급받는게 매우 일반적이었다.

완성차와 전기자전거, 전동공구 등을 생산하는 유수의 유럽 기업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과 중국 전지회사들과 공급망(SCM)을 구축해 왔다. 유럽은 그동안 리튬이온전지를 생산할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한국과 중국 전지회사들에 외주를 맡겼었다.

유럽 내 탄소중립과 전동화(electrification) 전환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유럽 기업이 생산한 배터리를 쓰자는 '경제 내셔널리즘(Economic nationalism)'이 확대되고 있다. 

유럽은 기가팩토리 '열풍'...자국 기업이 만든 배터리부터 쓴다

폭스바겐그룹은 7일(현지시간) 기가팩토리를 생산하기 위해 200억유로(한화 26조4754억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독일 북부의 잘츠기터(Salzgitter)에 기가팩토리를 건설해 전기차 및 ESS(에너지저장장치)용 배터리를 생산한다.

이번 투자는 폭스바겐그룹이 2030년까지 240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통상 1GWh 규모의 배터리 생산라인을 짓는데 1000억원에서 1500억원이 투입된다. 잘츠기터에는 150GWh에서 170GWh 규모의 기가팩토리가 지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유럽 기업들은 앞다퉈 기가팩토리를 짓고 있다. 노스볼트는 최근 11억달러(한화 1조4393억원) 규모의 전환사채(CB)를 발행했다. 노스볼트의 스웨덴 스켈레프테아(Skellefteå)에 위치한 기가팩토리는 최근 배터리를 고객사에 첫 출하했다. 노스볼트는 폭스바겐과 BMW 등에 각형 배터리를 납품할 계획이다.

브리티시볼트는 영국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에 2030년까지 38GWh의 기가팩토리를 건설 중이다. 영국과 캐나다 퀘벡에 총 100GWh에 달하는 배터리 생산능력을 확보해 전기차 및 ESS 회사에 납품한다는 계획이다. 총 100GWh 규모의 캐파 구축 시기는 현재까지 미정이다.

▲ 유럽에 공장을 짓고 있는 배터리 업체 현황.
▲ 유럽에 공장을 짓고 있는 배터리 업체 현황.

브리티시볼트는 금융권 출신인 오랄 나자리 대표이사가 2019년 창업했다. 그는 영국 최초의 배터리 회사를 설립해 다수의 금융기관에서 투자금을 모으고 있다.

모로우배터리는 노르웨이 아렌달(Arendal) 지역에 고성능 전기차 약 7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연산 42GWh 규모의 대형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스텔란티스와 프랑스 화학사 토탈이 합작해 설립한 ACC(Automotive Cells Company)는 올해 1월부터 프랑스에 기가팩토리를 건설하고 있다. 2공장은 독일에 건설할 계획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유럽에는 한국과 중국 배터리 공장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최근 유럽에서 전기차 및 ESS용 배터리 생산공장을 건설하는 스타트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유럽에는 △FREYR(노르웨이) △MORROW(노르웨이) △Amte(영국) △BritishVolt(영국) △ACC(프랑스) △Volkswagen(독일) △phi4tech(스페인) △Northvolt(스웨덴) △Inobat(슬로바키아) 등 9곳의 유럽 배터리 업체들이 있다.

유럽의 정치인과 전지업체의 CEO들은 공공연하게 아시아의 전지회사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7일 폭스바겐 기가팩토리 착공식에서 "얼마 전까지 독일인은 아시아의 전지회사에서 배터리를 공급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은 글로벌한 공급망 의존이 더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줬다"고 강조했다.

피터 칼슨 노스볼트 CEO는 "수십년 동안 세계의 리튬 산업은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 지배됐다"며 "우리는 배터리 시장의 지속가능한 제조업체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이 시장에 입성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행정명령을 통해 역내에서 생산된 배터리와 전지소재들에 대해 각종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미국 내에서 고용과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는 기업에 한해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전지업체의 국적까지 따지고 있어 경제 내셔널리즘이 더 강화되고 있다.

좁아진 K-배터리 시장...전지 소재 시장은 커진다

유럽의 이러한 흐름은 국내 전지업체들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삼성SDI 등 전지 3사는 중국 시장에서는 절대적으로 열위에 있지만,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는 중국 업체들보다 우위에 있다. 

국내 업체들은 최소 20년이 넘는 업력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은 1990년 초반부터 전지 사업을 시작해, 2000년 이후 소형 IT기기에서 여러건의 필드 사고까지 경험했다. 생산 및 품질 부문에서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고, 리스크 대응 능력 또한 뛰어나다.

국내 업체들에 있어 미국과 유럽은 가장 중요한 배터리 시장이다. 유럽과 미국 국가들은 늦어도 2035년까지 내연기관 차량을 시장에서 퇴출한다고 밝혔다. 전기차 신차 판매량은 매우 빠르게 늘어가고 있어 테슬라와 폭스바겐, GM 등 주요 완성차 업체들과 납품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현지에 유럽 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점은 부정적 이슈이다. 전기차 및 ESS용 전지시장이 커져도 유럽 기업이 생긴다면 외국 업체들의 시장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의 지난해 말 캐파는 150GWh로 집계됐다. 2025년까지 폴란드 유럽 공장의 캐파를 68GWh에서 115GWh로 69.1% 증설한다. 1GWh당 통상 전기차 1만5000대를 만들 수 있는데, LG에너지솔루션은 유럽에서만 전기차 70만대에 탑재할 수 있는 규모의 배터리를 추가로 생산한다.

SK온은 올해 말 18GWh 캐파인 헝가리 공장의 캐파를 48GWh로 확대한다. 유럽 전기차 시장의 성장 속도에 따라 캐파를 추가로 늘릴 계획이다. 삼성SDI은 헝가리에 30GWh 규모의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는데, 2025년까지 50GWh 규모로 늘린다.

국내 업체들은 2025년까지 유럽 내에서 약 97GWh 규모의 캐파를 늘린다. 유럽 전지업체들의 생산기지가 완공되면 국내 업체들의 시장은 좁아질 수 있다.

반면 소재 업체들은 셈법이 조금 다르다. 에코프로비엠과 포스코케미칼, 엘앤에프 등 국내 핵심 양극재 업체들은 국내 전지회사에 소재를 납품한다. 국내 전지소재 업체들의 핵심 고객은 국내 전지회사들이다. 그런데 유럽기업들이 유럽에 생산기지를 설립하고 있어 시장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이 커지고 있다.

유럽의 전지 회사들은 국내 소재 업체들과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의 전기차용 전지가 국내외 유수의 전기차에 탑재되고 있다. 이미 '트랙 레코즈'를 확보하고 있고 기술력 또한 우수해 국내 업체를 선호하고 있다.

▲ 왼쪽 민경준 포스코케미칼 사장.(사진=포스코케미칼)
▲ 왼쪽 민경준 포스코케미칼 사장.(사진=포스코케미칼)

포스코케미칼이 유럽의 모로우 배터리, 브리티시 볼트 등과 활발하게 사업 협력을 하고 있는 게 한 예다. 특히 포스코케미칼의 모기업인 포스코홀딩스는 오랜 기간 국내외 광물 업체들과 협력 관계를 구축해 왔다. 리튬과 니켈 등 핵심 소재까지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있어 포스코케미칼과 거래할 경우 전지용 희귀광물의 쇼티지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게 장점이다.

에코프로비엠은 이미 헝가리 데브레첸시에 1조원을 투자해 생산공장을 짓고 있고, 포스코케미칼은 캐나다에 GM과 합작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앞으로 유럽에 생산기지를 지을 계획인데 현지 업체의 수요를 조사 중에 있다. 포스코케미칼과 브리티시볼트는 유럽에서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를 하기로 했다. 협력이 확대될 경우 현지 공장 건설까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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