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실리콘밸리를 환상의 무대라고 부른다. 혁신과 가장 가까이 마주한 공간이라는 별명도 붙는다. 단순 창업자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직원 입장에서도 실리콘밸리는 환상의 무대다. 개인 역량을 이끌어내는 시스템과 인프라, 단순 '님' 문화가 아닌 진정성 있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이 대표 사례다. 

다만 이는 국내에서 바라본 실리콘밸리 이야기다. 실리콘밸리 근무자들이 느낀 실리콘밸리는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27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네이버 그린팩토리에서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2022' 행사를 열었다. 2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연사들은 각자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 왼쪽부터 김혜진 로블록스 프로젝트 매니저, 하대웅 아마존 부사장. (사진=스타트업얼라이언스)
▲ 왼쪽부터 김혜진 로블록스 프로젝트 매니저, 하대웅 아마존 부사장. (사진=스타트업얼라이언스)

영어 못했지만 일단 갔다
이날 행사는 3개 섹션(커리어·창업가·트렌드)으로 나눠 진행됐다. 가장 주목받은 커리어 섹션은 하대웅 아마존 부사장, 김혜진 로블록스 프로젝트 매니저, 곽수정 메타 뮤직 에디터, 임효지 엔비디아 산업 디자이너가 연사로 나섰다.

각자 경험은 달랐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하 부사장과 곽 에디터는 실리콘밸리에 도전하기 전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어학연수, 조기 유학 경험도 없었다.

▲ 왼쪽부터 임효지 엔비디아 산업 디자이너, 곽수정 메타 뮤직 에디터. (사진=스타트업얼라이언스)
▲ 왼쪽부터 임효지 엔비디아 산업 디자이너, 곽수정 메타 뮤직 에디터. (사진=스타트업얼라이언스)

하 부사장은 "한국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고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며 "큰 물에서 도전하고 싶었다. 당시 영어를 잘 못했다. 나이 30까지 어학연수 한 번 가본적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하 부사장은 도전했다. 미국으로 넘어갔고, 부사장으로 근무한 씨디네트웍스는 엑시트(Exit)를 이뤄냈다. 하 부사장은 "엑시트와 함께 몇 달 쉬었다. 이후 경영전문대학원(MBA) 과정을 밟았다"고 설명했다. 하 부사장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서 한 차례 더 근무한 뒤 지금의 아마존으로 자리를 옮겼다. 


▲ 하대웅 아마존 부사장이 자신의 주요 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블로터)
▲ 하대웅 아마존 부사장이 자신의 주요 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블로터)

곽 에디터도 영어와 친숙하지 않았다. 곽 에디터는 "대학교 2학년 때 버클리를 갔다. 6주 정도 생활했는데, 눈이 뜨였다"면서 "사람들이 공부하고 싶은 음악을 공부하고, 삶에 음악이 스며든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해외여행 경험도 없었고 영어도 잘 못했지만, 꼭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곽 에디터는 국내 대학 졸업 후 버클리로 재차 향했다.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서였다. 영어와 사운드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곽 에디터는 그간 클래식, 한국 전통 음악을 공부했다. 사운드 디자인은 생소한 분야였지만, 어느 때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강조했다.

도전은 성공이었다. 곽 에디터는 대학 교수 추천으로 얻게 된 작은 스튜디오 인턴 자리부터 시작했다. 차근차근 커리어를 넓혀갔다. 2017년에는 구글에 채용됐다. 유튜브 음악 콘텐츠를 관리하며 IT 기업을 경험했다. 2018년에는 메타(당시 페이스북) 사운드 디자인 팀에 합류,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이날 연사들은 참석자들과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영어, 커뮤니케이션 관련 질문이 쏟아졌다. 곽 에디터는 "저는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많았다. 의도하지 않은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A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상대방은 B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결을 위해 모든 미팅 내용을 받아 적었다. 꾸준히 반복해서 읽었더니 영어가 늘고 오해받는 빈도가 줄었다"고 조언했다. 

실리콘밸리 문화 적응기
김혜진 로블록스 프로젝트 매니저(PM)는 새로운 면접 문화에 놀랐다고 전했다. 김 PM은 "처음부터 로블록스에 들어간 게 아니고, 정말 많이 떨어졌다. 대학을 한국에서 나왔고, 한국에서 취업하는 지식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상하게 '나'와 '회사'의 관계를 계속 물어봤다. 또 5~6시간의 인터뷰 동안 '나'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스타일로 일하는지, 커리어 목표는 무엇인지, 관심 있는 건 뭔지 등이었다. 둘러대다 보니 말문이 막혔다. 나에 대해 질문하는데 제대로 된 대답이 안 나오니까 면접관도 답답해했다"고 설명했다. 

김 PM은 "저는 근면·성실·충성심을 어필하며 똑같은 이력서를 모든 회사에 이름만 바꿔서 써왔다. 언제든 회사가 원하는,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인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실리콘밸리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김 PM은 전략을 바꿔 회사에 적합한 '본인만의 스토리'를 넣기 시작했다. 코딩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 간호사 공부를 했다는 점, 교육자 길을 걸었다는 점 등 각기 다른 스토리를 하나의 스토리로 통합했고 로블록스에 합류했다. 

곽 에디터는 실리콘밸리의 다른 문화 중 하나로 '멘토링 프로그램'을 꼽았다. 곽 에디터는 "메타는 여전히 삼삼오오 모인 스타트업처럼 움직인다. 업무적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는 걸 이곳에 와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 곽수정 메타 뮤직 에디터. (사진=스타트업얼라이언스)
▲ 곽수정 메타 뮤직 에디터. (사진=스타트업얼라이언스)

곽 에디터는 "과거 에너지 100%를 일에 쏟았다면, 지금은 30% 정도를 동료와 관계를 쌓아가는데 쓴다. 같이 산책도 하고, 일상을 나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회사에서도 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고 덧붙였다.

대표적인 게 매니저와의 1대1 미팅, 컨스트럭티브 피드백(Constructive Feedback)이다. 곽 에디터는 "1주일에 1대1 미팅에 30분이 주어진다.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며 "내가 하고 있는 고민, 목표를 말했더니 팀과 매니저가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컨스트럭티브 피드백은 일종의 동료 평가다. 동료들이 본인의 성과와 결과물을 평가하는 시간이다. 국내 기업 중에도 도입한 곳들이 있다. 곽 에디터는 "사실 두렵다. 리뷰가 안 좋으면 승진에 안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고민도 했다"면서 "지금은 모자란 퍼즐을 맞추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경기 침체, 실리콘밸리에서도 느껴진다
이날 질의응답 시간에는 실리콘밸리에서도 '경기 침체'가 체감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시장에선 경기 침체 확률이 2008년 금융위기 수준까지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26일(현지시간) "투자자들이 모든 것을 내다 팔고 있다"며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질 확률이 98%"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 부사장은 "실리콘밸리는 레이오프(lay-off)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쉽게 설명하면, 조직 자체를 날리는 것이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탓에 조직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정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올해 3월부터 실리콘밸리에서 레이오프가 정말 많이 일어나고 있다. 10만명 단위라는 말도 나온다. 이런 식으로 레이오프가 잦아지면 경기가 체감될 만큼 나빠진다"고 말했다.

김 PM은 "집을 헐값에 파는 곳들도 있더라. 물가가 정말 많이 올랐다. 제품 가격도 이전과 비교하면 거의 2배 수준이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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