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맹(computer盲) [명사] 컴퓨터를 전혀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을 문맹(文盲)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민중국어사전)

무심코 쓰는 이 말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맹'은 장님을 가리킨다. '까막눈'이라고도 한다. 여기엔 '시각장애인=무능'이란 인식이 투사돼 있다. 컴퓨터든 글자든.

시각장애인들에겐 일상이 곧 벽이다. 비장애인에겐 당연한 일상 생활이 시각장애인에겐 보이지 않는 장벽 탓에 높은 문턱으로 돌아온다.

이들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들까. 올해로 설립 9년째를 맞은 엑스비전테크놀로지 얘기다.

엑스비전테크놀로지엔 시각장애인 '능력자'들이 모여 있다. 송오용(40) 대표를 포함한 직원 11명 가운데 8명이 시각장애인이다. 이들은 시각장애인용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든다. 국내에선 으뜸으로 꼽히는 제품이다. 비장애인이라면 이런 제품을 만들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시각장애인인 덕분에 남들보다 뛰어난 제품을 만들었다. 얄궂은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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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오용 대표는 25살이던 1994년 컴퓨터 프로그래밍 세계에 본격 뛰어들었다.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난 '매킨토시'에 빠져 독학으로 간단한 프로그램을 직접 짤 실력까지 올랐지만, '프로그래머 송오용'의 인생은 20대 중반부터 시작됐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게다.

"요즘에야 초고속 인터넷도 잘 보급돼 있고 자료도 어렵잖게 구할 수 있지만, 당시엔 달랐어요. 컴퓨터 사양도 낮았고, 더구나 시각장애인 개발자는 손꼽을 정도였죠. 다행히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PC통신망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거기서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강의도 듣고 자료를 주고받으며 컴퓨터를 배웠죠."

그가 일찌감치 염두에 둔 제품은 시각장애인용 스크린리더였다. "시각장애인들이 컴퓨터를 다루려면 화면 내용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스크린리더를 반드시 써야 합니다. MS 도스 시절부터 외국에서 들어온 스크린리더를 시각장애인들이 쓰고 있었는데요. 'MS 윈도우'가 나오면서 달라졌어요. 윈도우 환경이 제대로 지원이 안 되고 인터넷도 이용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어요.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참에 우리가 직접 만들어 쓰고 시각장애인에게 보급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송오용 대표는 잘 다니던 실로암복지관을 그만두고 스크린리더 개발에 본격 뛰어들기로 했다. 서울맹학교 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 셋이 힘을 보탰다. 뜻을 모은 넷은 1천만원을 밑천삼아 서울 문래동 공장지대에 조그만 사무실을 냈다. 마케팅을 맡은 김정호 이사를 뺀 셋은 1년3개월여 동안 꼬박 스크린리더 개발에 매달렸다. 그렇게 2003년 9월 '센스리더'가 세상에 나왔다.

"첫 목표는 두 가지였어요. 인터넷을 쓸 수 있고, MS 오피스와 아래아한글을 지원하는 스크린리더를 만들자는 것이었죠. 시각장애인이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 기본이 되는 일이니까요. 가상 환경에서 인터넷을 띄우고, MS 오피스와 아래아한글 캐럿과 화면 글자를 분석해 결국 구현해냈어요. 국내 최초였죠."

함정은 생각지도 못했던 데 도사리고 있었다. 한 국내 업체가 '스크린리더' 전체에 특허를 걸어놓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말 그대로, 눈 앞이 깜깜했어요. 힘들여 개발한 제품을 팔지도 못하고 접어야 하나 싶었죠. 3년여 소송 끝에 결국 특허 무효 판결을 받아냈지만, 당시엔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엑스비전테크놀로지는 매출이 한 푼도 없었다. CD를 찍을 돈도 없어 허덕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엑스비전테크놀로지를 도와준 건 주변 시각장애인들이었다.

"처음 제품을 내놓았을 땐 딱히 홍보 방법을 몰라, 입소문을 내고 체험판을 돌려가며 품질을 알리는 데 주력했어요. 당시 외국 제품은 100만원 안팎이었는데, 센스리더는 38만5천원이란 파격적 가격에 내놓았죠. 그런데 어느 날, 시각장애인들이 소문을 듣고 공동구매 신청을 했어요. 한 번에 230개 제품을 판매하면서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 해 12월에 다시 비슷한 규모로 공동구매가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한 해동안 500개를 판매했어요. 그 때 기분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회사를 살려준 고마운 분들이니까요."

센스리더는 곧바로 입소문을 탔다. 윈도우XP가 대중화된 시절에도 MS 도스에 머물러 있던 국내시각장애인에게 센스리더는 말 그대로 인터넷과 윈도우 환경에 눈을 뜨게 해준 제품이었다.

센스리더는 외국산 제품들을 따돌리고 국내 시장에서 80%에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한 대표 스크린리더로 자리잡았다. 송오용 대표는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한다. "시장만 놓고 보면, 국내는 이미 포화 상태입니다. 국내 시각장애인이 대략 2만여명니, 이미 시장은 찼다고 봐야겠죠. 우리는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목표로 시작했습니다. 외국은 장애인 지원 제도나 마케팅 방식이 한국과 다르고 진입 장벽도 높은 편이라 아직 못 나가고 있긴 하지만, 머잖아 꼭 해외에서 제품으로 인정받을 겁니다."

송오용 대표는 요즘들어 고민이 깊어졌다. 스마트폰 운영체제나 웹브라우저에서 자체 스크린리더를 지원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엑스비전테크놀로지 입장에선 불안한 조짐이다. 아직까진 전문 스크린리더만큼 완성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기술 발전을 무시할 순 없는 형편이다. 급속히 확대되는 모바일 환경에 대응해야 할 숙제도 안고 있다. 언제까지 스크린리더 제품에 안주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마침 내년은 회사 창립 10주년을 맞는 해다. 전환점을 마련할 시기가 됐다.

엑스비전테크놀로지는 요즘 새로운 제품 개발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북셰어'란 프로그램인데요. 시각장애인이 어디서나 PC와 모바일로 책을 편리하게 읽을 수 있게 돕는 시스템입니다. 서버와 PC, 휴대기기를 연동해 책을 편리하게 읽고, 자료도 쉽게 검색하고,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게 할 겁니다. 스마트폰용 앱도 제공할 계획이고요. 한마디로, 시각장애인이 책을 편리하게 읽고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합 솔루션인 셈이죠."

송오용 대표는 올해 11월까지 1차 작업을 마무리하고 '북셰어'를 본격 선보일 심산이다. '북셰어'는 엑스비전테크놀로지가 외국시장 문을 두드리는 첫 제품이기도 하다. 2007년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장애인 접근성이 의무화되는 국내 상황도 엑스비전테크놀로지엔 기회다.

송오용 대표는 지금도 PC 앞에 붙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하루를 보낸다. 모니터는 아예 꺼둔다. 화면을 볼 순 없지만, 프로그램 개발에 큰 불편함은 없다. 간단한 프로그램은 직접 만들어 쓰기도 한다. 스마트폰용 앱을 개발해 테스트할 땐 스크린리더가 에뮬레이터에 접근할 수 없어 직접 스마트폰을 놓고 테스트하는 걸로 대신한다. '시각장애인은 프로그램 개발 속도나 수준이 뒤처질 것'이란 인식은 송오용 대표와 엑스비전테크놀로지 식구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2011년 현재 국내 시각장애인 개발자는 20여명 안팎이다. 주변에선 송오용 대표를 그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는다. 그래서 송오용 대표와 엑스비전테크놀로지는 늘 '부채감'을 안고 산다. "시각장애인들은 특정 프로그램을 센스리더가 지원하지 못하면 우리 회사에 전화를 걸어 문의하곤 합니다. 실제로는 해당 프로그램이 접근성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가 대부분이죠. 보안을 이유로 접근성 기능을 막아둔 곳도 여럿이고요. 그래도 한켠에선 늘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어요. 우리가 좀 더 노력해서 더 많은 프로그램과 기능을 지원해줘야 할 텐데요."

송오용 대표는 틈날 때마다 후배 시각장애인 개발자들에게 "끝까지 노력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될 지 안 될 지를 먼저 따지지 말고, 하고픈 일이 있다면 끝까지 노력을 다해야죠. 관심과 흥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요즘엔 공부에 필요한 자료를 얻기도 쉬워졌고, PC나 응용프로그램 성능도 좋아졌잖아요. 후배들이 보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훌륭한 개발자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SW 접근성, 아직은 뒷전"

한국은 2007년 4월10일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했다. 2009년 공공기관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개인 홈페이지를 뺀 모든 국내 웹사이트는 장애인 접근성을 의무 준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SW 영역으로 넘어오면 아직 암흑 천지다. 여전히 시각장애인에게 SW는 접근하기 힘든 제한구역으로 남아 있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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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jh
김정호 엑스비전테크놀로지 이사는 무엇보다 보안SW를 문제삼는다. "요즘들어 보안 프로그램만 깔면 스크린리더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민원이 여러차례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부는 '업체에 장애인 접근성 부담을 과도하게 줘서 경쟁력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는데요. 외국 어디서도 보안 프로그램 때문에 스크린리더가 동작하지 않는다는 얘길 들어본 적 없습니다. 보안을 유지하면서 접근성을 보장하는 게 과연 업체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일인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걸림돌은 이 뿐 아니다. 시각장애인은 국내 음악 서비스에 들어가도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주요 음악 서비스가 제공하는 음악 재생기 SW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SW는 아예 설치부터 시각장애인이 건드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국내 업체들이 시각장애인을 고객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김정호 이사는 꼬집었다.

결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웹사이트로 들어가면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송오용 대표는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 G마켓을 주로 이용한다. "그나마 G마켓이 장애인 접근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 때문"이란다. "시각장애인은 웹사이트를 하나 이용할 때마다 이용 방법을 일일이 배워야 합니다.  한 번 익혀두면 다음부터 어느 정도는 쓸 수 있게 되죠. 그러다가 웹사이트가 리뉴얼을 하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아예 인터넷 접속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시각장애인도 적잖습니다."

이는 시각장애인 경쟁력과도 직접 연결된다. 김정호 이사는 "시각장애인은 현실적으로 공공기관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각장애인은 지금 공공기관이 쓰는 전자결제 시스템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보안 시스템이 스크린리더를 막는 경우도 적잖아요. 요즘엔 클라우드 서비스들이 앞다퉈 나오는데, 시각장애인에겐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운 서비스에요. 우리같은 스크린리더 업체들이 이런 신기술에 일일이, 빠르게 대응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은 장애인이 일을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장애인을 무능하다고 탓합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자연스레 진입 단계부터 막히거나 도태되고 마는 것이죠."

국내에선 한국정보화진흥원(NIA)이 정보격차 해소 프로그램에 따라 접근성 보장 정책과 장애인 보조기기 보급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정호 이사는 "지금껏 정보화진흥원이 장애인 접근성 보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만큼, 이를 한 단계 더 올릴 수 있는 사업에 힘을 기울여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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