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사진=각사)
▲ 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사진=각사)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둘러싼 '배터리 전쟁'이 출구 없이 격화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국제무역위원회(ITC)의 거부권을 기대하며 '배수의 진'을 치는 모습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SK이노베이션에 "진정성이 결여됐다"며 몰아붙이고 있다. 양사 모두 배터리 사업의 '손익분기점(BEP)'을 조기 달성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이사회는 11일 사외이사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확대 감사위원회를 열었다. 이날 감사위원회는 지난달 10일(현지시간) 발표된 ITC의 최종판결을 심층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ITC 판결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 LG에너지솔루션과의 협상 상황 등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5일 한차례 협상을 진행했다. 양측은 협상금에 대한 이견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5일 기업설명회를 열고 "SK가 제시한 합의금은 자사가 고려한 합의금과 조단위가 차이난다"고 밝혔다.

이날 이사회는 LG에너지솔루션의 요구사항에 사실상 수용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에둘러 전달했다. 이사회는 "경쟁사의 요구조건을 면밀히 들여다보겠지만 SK이노베이션이 미국에서 배터리 사업을 지속할 의미가 없거나 사업 경쟁력을 현저하게 낮추는 수준의 요구조건은 수용 불가능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양측이 합의금 규모를 좁히지 못할 경우 사실상 미국 사업을 철수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요구하는 동시에 LG에너지솔루션이 요구하는 수준의 합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의미다. SK이노베이션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내달 10일 ITC 판결을 수용할 경우 2023년부터 10년 동안 미국 내에 배터리 관련 원부자재를 수입할 수 없다. 사실상 미국 내에서 생산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미국 행정부로부터 각사에 유리한 결정을 이끌어 내기 위해 배터리 공장을 증설할 계획을 시사했다. 미국은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전혀 없게 하는 '넷제로'를 달성하기 위해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 판매를 장려하고 있다. 현재 미국 내에는 일본 파나소닉과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다. 중국 배터리업체는 미중 간 불확실성을 이유로 미국 내 공장을 갖고 있지 않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미국 현지 일자리와 투자를 볼모로 미국 행정부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  미국 내 주요 배터리 생산기지 현황.(자료=Benchmark Minerals Intelligence)
▲ 미국 내 주요 배터리 생산기지 현황.(자료=Benchmark Minerals Intelligence)

SK이노베이션은 미국 배터리 산업의 '밸류체인'과 미중 갈등 등 국제 정세를 '지렛대'로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내에서 생산을 못할 경우 현지 배터리 밸류체인은 사실상 파나소닉과 LG에너지솔루션만 남게 된다. 국내 업체 1곳과 일본 업체 1곳이 남게 될 경우 미국 내 수요업체들은 '바잉파워'가 줄게 돼 결과적으로 미국과 글로벌 수요업체에 부정적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 같은 점을 활용해 LG에너지솔루션과의 협상에 있어 '영업비밀 침해 당사자'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  현대차 전기차 화재 리콜 관련 현대차 및 LG화학의 충당금 현황.(자료=금융감독원)
▲ 현대차 전기차 화재 리콜 관련 현대차 및 LG화학의 충당금 현황.(자료=금융감독원)

반면 LG에너지솔루션은 상황이 좀 더 불리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현대차와 8만여대의 리콜 비용을 분담하기로 했다. LG에너지솔루션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최소 6000억원, 최대 1조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글로벌 판매량 확대로 인해 흑자 전환을 예상했는데, 리콜 비용으로 인한 충당금을 반영하면서 1717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이런 점은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과 합의를 필요로 하는 요인이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은 지난해 4265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날 논평을 통해 이사회 결정에 대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영업비밀보호법에 근거한 (합의금) 제안을 가해자 입장에서 무리한 요구라며 수용 불가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문제해결에 대한 진정성이 결여된 태도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LG에너지솔루션은 "SK이노베이션이 진정성 있게 협상 테이블로 와서 논의할 만한 제안을 하고 협의한다면 현금과 로열티, 지분 등 주주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보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사실상 SK이노베이션에 현금유출이 없는 보상안도 가능하다고 합의점을 열어둔 것이다.

그럼에도 양측이 합의를 통해 이번 '배터리 전쟁'을 마무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모두 1990년대부터 배터리 사업을 준비하면서 천문학적인 투자금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투자를 진행한 끝에 전기차 시대가 열렸고, 양사는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배터리 산업은 자본집약 산업으로 생산공장을 짓는데 수조원이 들어간다. SK이노베이션이 21.5GWh 규모의 생산공장을 짓는데 투자한 금액은 약 3조원이다. 산술적으로 환산하면 1GWh당 1400억원에 달한다. 양사 모두 아시아(한국, 중국)와 미국, 동유럽에 생산공장을 확보하고 있다.

▲  LG에너지솔루션 전지 영업이익 추이.(자료=금융감독원 및 당사 IR북)
▲ LG에너지솔루션 전지 영업이익 추이.(자료=금융감독원 및 당사 IR북)

양사 모두 천문학적인 투자금을 들였지만 배터리 산업은 마진이 박한 산업이다. CATL을 제외하면 두 회사 모두 배터리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마진은 3% 안팎이다. 양사 모두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동시에 안정적인 납품처가 필요하다. 손익분기점을 가능한 한 빨리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때문에 LG에너지솔루션은 현대차에 지급할 리콜 비용에 발목이 잡혔고, SK이노베이션은 수조원에 달하는 합의금을 지급할 수 없는 것이다. 양사 모두 '배터리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는 이유다.

▲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 실적 추이.(자료=SK이노베이션 IR북)
▲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 실적 추이.(자료=SK이노베이션 IR북)

업계 관계자는 "마진이 낮은 배터리 산업 특성상 생존경쟁에 치열할 수밖에 없다"며 "두 회사 모두 국익과 기업 이미지가 훼손되더라도 법적 소송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블로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