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은 어느 서점에서 사도 읽는 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전자책이다. A서점에서 샀으면 A서점에서 만든 뷰어나 A서점이 지원하는 단말기로만 읽어야 한다. A서점 전자책 뷰어가 조악하더라도 도리가 없다. 이는 A, B, C서점이 저마다 사용하는 전자책 디지털저작권관리(DRM)이 다르기 때문이다. 벅스에서 산 mp3 파일은 벅스 전용 플레이어나 모바일 앱, 벅스와 제휴한 재생기로만 들을 수 있던 때와 비슷하다.

국내 전자책 시장에서 유통사마다 다른 전자책 DRM 솔루션을 사용하고 있다. DRM 업체가 마련한 솔루션을 변형하거나 독자 DRM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장 상황에서 전자책 단말기 제작자는 각 유통사에 맞는 DRM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태블릿PC와 스마트폰, PC 뷰어쪽도 마찬가지다.

EPUB 전자책을 파는 곳이 한두 곳이 시장을 장악했다면 이러한 모습이 독자에게 불편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국내 전자책 시장은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반디앤루니스, 인터파크, 메키아 등 다양한 전자책 업체가 있고 절대 강자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 출판사가 전자책 콘텐츠를 모든 유통사에 납품하는 것도 아니다. 유통사별로 공급하는 콘텐츠를 가리기도 하고 계약을 맺지 않는 유통사도 있다. 결국 전자책 독자는 책을 찾아 유통사를 전전해야 하는 형편이다. 뷰어가 조악한 유통사에서 책을 사면 꼼짝없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전자책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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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선 한글과컴퓨터 표준기술팀장은 “현재 전자책 DRM은 저마다 다른 솔루션을 사용하고 있어, 사용자가 유통사마다 다른 솔루션을 이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라면서 “전자책 시장 측면에서는 활성화를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라고 지금의 전자책 DRM 상황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2년이 지나고 나면 이런 상황이 조금은 바뀌게 될 전망이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국제 표준 ePUB 기반 eBook DRM 표준 레퍼런스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이하 DRM 표준 레퍼런스)이라는 연구 용역 사업을 2013년께 완료할 계획이다. 2년짜리 이 연구 사업은 파수닷컴과 한글과컴퓨터, 교보문고, 한국이퍼브, DRM인사이드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맡았다. 정부예산은 2년간 총 1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사업명에 ‘DRM 표준’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전자책 업계에 특정 DRM을 쓰라고 강제할 계획은 아니다. 전자책 DRM간 호환성을 높이고자 하는 게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목표다. 쉽게 말해 전자책 DRM의 기본 틀을 마련해 공개하겠다는 이야기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5곳 업체는 전자책 파일을 암호화하는 방식과 키 전달 방식, 라이선스 정보와 형식에 대한 틀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 틀은 API 형태로 공개된다.

전자책 DRM 표준 레퍼런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주관한 ‘스마트 환경에서의 효과적 저작권 보호를 위한 기술 세미나’에서 10월19일 공개됐다.

안혜연 파수닷컴 부사장은 이 자리에서 “전자책 DRM 표준 레퍼런스 소프트웨어는 EPUB 2.0과 3.0에 기반해 API로 만들어지고, 이 API를 활용한 DRM 솔루션을 제작해 전자책 앱에 적용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5곳 업체가 모인 컨소시엄은 6월 한국저작권위원회와 계약을 체결하고 7월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현재 전자책 DRM 표준 레퍼런스 사업은 EPUB 2.0과 3.0, W3C가 제안하는 전자서명의 표준, 암호화 표준, 인증서, 시장의 요구 등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API 설계까지 완료한 상태다. 내년 3월에는 교보문고에 시범 적용할 계획도 잡혀있다고 안혜연 부사장은 말했다.

전자책 DRM은 단순하게 어느 뷰어에서만 보여줄 것인지를 가리는 건 아니다. DRM은 디지털 파일에 대한 판매와 정산, 대여, 파일 접속 권한 등을 관리하는 솔루션이기도 하다. 전자책 DRM이 업체마다 호환돼도 이 기능은 유지돼야 한다.

안혜연 부사장은 “API 개발을 완료해 EPUB 뷰어에 적용하고 실제 시스템에서 제대로 구현되는지도 볼 것이며, 2개 이상의 솔루션이 상호 연동되는 모듈도 테스트해야 한다”라며 진행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하지만, 컨소시엄이 전자책과 DRM 전문 업체로 구성된 터라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한글과컴퓨터는 EPUB 저작도구를 만들고, EPUB을 국제 표준으로 만드는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글과컴퓨터는 전자책 DRM을 서비스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DRM 전문업체인 파수닷컴이 컨소시엄을 이끌고 있다.

이 컨소시엄은 국내 전자책 업체로는 1위인 교보문고와 예스24를 비롯한 여러 전자책 업체와 출판사가 모인 한국이퍼브를 참가사로 뒀다. 특히, 1위 사업자인 교보문고가 DRM 표준 레퍼런스를 앞장서 적용해 시장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 업체가 결과물을 채택하면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안혜연 부사장은 전자책 DRM 표준 레퍼런스 작업이 완료되면 DRM 시장뿐 아니라 전자책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했다. “지금은 DRM 업체와 전자책 유통사가 폐쇄적인 관계를 가졌지만, 이제 개방적인 관계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DRM 관련한 신규 창출되거나 다양한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전자책 시장이 활성화해 시장 규모도 커질 것이고요. 음원 시장이 DRM 때문에 DRM 프리로 변한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전자책 DRM 표준 레퍼런스가 마련되면 전자책 독자는 어떠한 이점이 있을까. 양질의 전자책 전용 뷰어 하나로 여러 유통사에서 구매한 전자책을 모아서 볼 수 있고, e잉크 전자책 단말기를 살 때 어느 유통사를 지원하는지 따지지 않아도 된다. 뷰어 제조사나 단말기 제조사가 여러 전자책 DRM을 적용하는 과정이 이전보다 간편하기 때문이다.

B2B로만 이루어진 전자책 DRM 서비스가 B2C로 등장하는 모습도 그려볼 수 있다. 1인 출판사나 개인이 유통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전자책 DRM을 씌우는 것도 가능하다. 개인이 DRM 키를 관리해 전자책을 보여줄 사람을 정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겠다. DRM이 파일을 열 수 있는 횟수와 기간, 지역 등도 관리하는데 개인이 이 기능을 쓸 수 있게 되면 재미있는 응용서비스도 등장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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