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이 '정책&지식 포럼’에서 ‘셧다운제’ 문제를 들고 나왔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은 4월28일 ‘강제적 셧다운제와 선택적 셧다운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공교롭게도 나흘 전인 지난 4월24일 헌법재판소에서 셧다운제가 위헌이라는 문화연대와 한국인터넷디지털콘텐츠협회의 위헌소송을 기각했다. 셧다운제가 합헌이라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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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숙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홍준형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전종수 한국정보화진흥원 정보문화사업단 연구위원, 이준웅 서울대학교 언론정부학부 교수(왼쪽부터)


"치킨 중독이면 치킨집도 셧다운할 건가?"

토론회에 참석한 우지숙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는 “치킨집 사장에게도 체중조절 비용 부담금을 물려야”한다며 재치있는 발언을 쏟아냈다. 게임을 중독으로 모는 정부의 인식에 던진 농담 속에 비수를 숨긴 것이다.

“치킨 중독의 폐해는 당해본 사람만이 알아요. 밤 10시 이후에 치킨을 배달할 수 없도록 하면 얼마나 고마울까요. 혹은 튀겨서 팔면 치킨 중독 증상이 심해지니 삶아서 팔도록 하는 거죠. 치킨 중독이 훨씬 줄어들지 않겠어요?”

우지숙 교수는 또 “체중조절 상담을 치킨집 사장이 맡도록 하고, 다이어트에 드는 비용도 치킨집 사장이 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며 말을 이었다.

손인춘 의원이 지난 2013년 국회 발의한 이른바 ‘치유지원법’을 겨냥한 발언이다. 치유지원법은 게임 업체가 게임 중독 치유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법안이다. 게임 업계에 이 같은 책임을 묻는 것은 치킨집 사장에게 다이어트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우지숙 교수의 주장이다.

셧다운제 자체가 앞으로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우려스럽다. 셧다운제는 개인의 행동에 국가가 개입하는 통에 개인이 스스로 제어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지숙 교수는 “조절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며 “오히려 게임을 중간에 끊어버리는 셧다운제가 게임에 대한 의존성을 더 높이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라고 지적했다.

16세 미만 청소년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10시 이후에는 강제로 게임을 그만둬야 할 것이다. 우지숙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청소년은 스스로 절제하고, 조절할 능력을 국가로부터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게임을 의존과 미련이 남는 대상으로 만든 것은 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제도로 무장한 국가인 셈이다.

“모두를 아이로 만드는 사회”

“청소년을 너무 미성숙한 존재로만 보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지 동네 사람, 심지어 국가까지 나서서 청소년의 올바른 발달을 위해 한가지라도 더 간섭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거죠. 이런 식의 규제 체제가 청소년의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야 합니다.”

이준웅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셧다운제를 가리켜 ‘후견주의적 국가 규제’라고 불렀다. 국가가 개인의 대부 노릇을 하는 사회에서 대부는 개인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자율적인 행위에 간섭한다. 셧다운제는 후견주의적인 국가관이 팽배한 사회가 개인에 내린 구속 판결이라는 설명이다.

루소의 교육사상이 이를 잘 설명한다. 루소는 교육자가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창의력이나 자연적인 심성을 오히려 억제하는 것으로 봤다. 17세기 루소의 사상은 근대 교육의 핵심 가치가 됐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가르치지 않을 것인가에 집중하게 됐다.

이준웅 교수는 “이는 교육의 놀라운 딜레마인데, 루소가 문제를 제기한 이래로 교육의 핵심 가치로 기능해왔다”라며 “아직 우리나라는 이런 사고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이 같은 교육 방향은 오히려 미성숙함을 배양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가 24일 셧다운제 위헌소송에 내린 합헌 결정문을 다시 보자.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인 만큼 성인과 달리 게임 시간을 조절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정의했다. 온라인게임 특성상 쉽게 중단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따라서 셧다운제는 과도한 규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셧다운제에서 우리 사회는 청소년의 후견인을 법적으로 자처한 셈이다.

이준웅 교수는 “이런 규제 속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일정 나이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규제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결국 미숙한 어른이 또 자신의 아이를 규제하는 후견주의적 국가의 근본적인 문제가 반복되는 꼴”이라고 설명했다.

‘셧다운제' 넘어 ‘권리’ 문제로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여러모로 기운 빠지는 일이다. 셧다운제가 위헌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문을 받아들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합헌 결정이 나온 만큼 똑같은 문제로 재차 위헌소송을 제기할 명분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얼마나 ‘미숙한’ 존재로만 평가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안타깝지만, 앞으로 셧다운제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기는 어려울 것임이 분명하다.

헌데,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을 끝이 아닌 시작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좁은 의미에서 셧다운제 문제는 끝날지라도 더 넓은 차원에서 청소년의 권리문제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셧다운제 논의의 끝에서 청소년의 권리와 국가의 교육방침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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