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 인수 관련,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ARM은 굉장히 중요한 회사다. 특정 누군가가 (인수) 이익을 다 누리도록 (반도체) 생태계 안에 있는 기업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지분을 공동 인수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대표이사 부회장의 발언이다. 박정호 부회장은 30일 SK하이닉스 주주총회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이 같이 전했다.
박정호 부회장은 지난 28일 SK스퀘어 주주총회에서도 "ARM도 사고 싶다. (SK스퀘어가) 투자 회사니까 꼭 최대 지분을 사서 컨트롤하는 걸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는 ARM을 400억 달러(약 48조3680억원)에 인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각국 규제 당국이 '독점 금지'를 이유로 인수합병(M&A)을 승인 거부하면서 딜은 최종 무산됐다.
'독점'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RM은 반도체 칩 설계 업체다. 단순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아닌, 시장을 이끄는 설계 업체다. 2020년 기준 모바일 칩 설계 시장 점유율 90%, 태블릿 설계 시장 점유율 85%를 차지하고 있다.
ARM은 현재 애플, 퀄컴, 삼성전자, 엔비디아 등 다양한 반도체 업체에 AP(칩 설계)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업체가 ARM을 인수하면 현재 비즈니스 구조에 문제가 생긴다. ARM 칩 설계 제공에 특정 업체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다.
식당과 식자재 납품 업체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지금까지 4곳의 식당들이 A 업체에서 식자재를 제공 받았다. 하지만 식당 한 곳이 A 업체를 인수하는 순간 현재의 비즈니스 구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게 '엔비디아-ARM' 인수 무산의 핵심 쟁점이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엔비디아의 ARM 인수 계획 소식이 전해진 뒤 업계에선 크게 두 가지를 우려하며 반발했다. 엔비디아가 ARM이 제공하는 설계사용료를 높이거나 특정 업체에 대해서는 기본 설계도를 제공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앞선 사례를 고려하면, SK ICT연합(SK스퀘어·SK하이닉스·SK텔레콤) 단독 인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박정호 부회장이 '공동 인수'를 언급한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최근 진행된 SK하이닉스의 도시바 메모리 사업(현 키옥시아) 인수,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2018년 베인캐피털 등 재무적투자자(FI)들과 컨소시엄을 이뤄 도시바 메모리 사업을 인수했다. 최근 진행된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는 별도 투자자 없이 진행됐다.
엔비디아와 SK ICT연합을 제외하면 반도체 생태계를 구성하는 업체 중 ARM에 공식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기업은 인텔이 유일하다.
펫 갤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월 로이터와 '인텔 인베스터 데이 2022' 관련 인터뷰를 진행했다. 펫 갤싱어는 이 자리에서 ARM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이 구성되면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또 ARM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이 구성되고 있다는 점도 전했다. 펫 갤싱어는 “ARM은 인텔 파운드리 사업 어젠다로 만들수 있다”며 “컨소시엄 구성 시 어떤 형태든 참여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텔은 이미 고유 설계 아키텍처인 X86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파운드리 부문을 최근 강화하고 있는 만큼, 파운드리 고객사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히기 위해 ARM 인수를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