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사진=홈페이지)
▲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사진=홈페이지)

아시아나항공 직원 여러 사람이 묻습니다. "진짜 합병하는 것이냐"고요. 그리고 꼭 덧붙여 묻습니다. "정부가 하고 있는 것 맞죠"라고요. 대답은 쭈뼛쭈뼛하게 했습니다. "산업은행이 정부랑 협의를 해서 발표했으니 그럴것 같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상합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문제, 이걸 왜 산업은행이 발표하나요. 구조조정 중인 두 회사의 자금 지원 이슈라면 산업은행이 하는게 맞죠. 그런데 이 문제는 아젠다의 레벨이 다르죠. 32년만의 복수민항 폐기와 같은 기념비적 정책 결과가 예상됩니다. 국적항공사를 복수 체제로 둘 지, 독점 체제로 둘 지 등 국가 항공산업 100년을 좌우하는 문제죠.

광화문 광장 위치 하나 조정하는데도 서울시는 지난 4년간 300회가 넘는 토론 자리를 시민과 마련했다죠. 2개월만에 뚝딱 결정된 양대 항공사 통합 결정, 코로나 사태가 엄중하니 긴박해서 그런 걸까요. 하지만 이 결정과 발표를 왜 산은이 앞장서 국민을 설득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통합 추진의 정당성과 필요성에 대한 여러 의문은 지금도 산업은행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죠.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왜 산업은행이 국가항공정책의 대계(大計)를 단 2개월만에 결정하나요"라는 질문요.

이 의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후대의 항공산업 종사자들은 우리나라 산업은행이 정부부처보다 위에 있고 항공 주무 관청은 국토교통부가 아니라 산업은행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좀 과장되긴 했지만 각 항공사 항공정책 실무진들은 실제 국토교통부의 눈치보다 산업은행의 눈치를 더 많이 보는 것 아닌지 생각도 드네요.

▲  아시아나항공 1988년 국내선 첫 취항 기념식 모습.(사진=아시아나항공 홈페이지)
▲ 아시아나항공 1988년 국내선 첫 취항 기념식 모습.(사진=아시아나항공 홈페이지)

1988년 2월12일 우리나라가 처음 복수민항 체제를 시작하던 날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당시 언론 기사들을 모두 종합해보니 복수민항 체제가 시작되기까지는 꽤 긴 기간 진통이 있었습니다.

중동 경기가 한창 좋을 때는 대우그룹이 제2민항을 추진한다는 소문이 있었고요. 삼성·현대·한국화약(현 한화그룹)·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등이 사업계획을 짜놓고 관계당국에 로비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도 심심치않게 나돌기도 했습니다. 국회에서는 '제2민항추진설'의 진상을 밝히라는 얘기도 비일비재했다죠. 하지만 정부는 모두 부인했고요. 그러다 1988년 2월1일 한일항공회담이 발표된 직후 우리나라 항공사의 일본취항 편수가 대폭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 등 관광 수요 급증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2월12일 전격적으로 제2민항이 허가됐습니다.

노태우 정권 출범 10일을 앞둔 시기 전격 발표였는데요. 금호그룹이 제2민항사로 선정됐고요. 당시 차규헌 교통부 장관은 정부 고위층들과 여러 회동을 거친 뒤 12일 오전 10시 이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금호그룹이 선정된 것도 예상 밖이었고 제2민항을 허가해주는 사실도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복수민항 체제가 항공정책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역사적 사실이죠.

지금도 그래야 하지만 그 당시도 복수민항 허용을 관장하는 주무부처는 교통부(현 국토교통부)였습니다. 입안하고 계획을 세우고 부처간 실무 조정도 맡았죠. 제2민항 허가 발표도 교통부 장관이 했습니다.

시간도 굉장히 많이 소요됐습니다. 제2민항 설립 허가설 루머로 나돈 기간도 대략 4~5년간이나 됐습니다. 준비하고 발표하는데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고요. 청와대가 최종 의사결정을 했을 거라는 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복수민항 정책은 국가적으로도 비중있게 다루어야 하는 산업정책 중 하나입니다.

▲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통합 추진 산업은행 보도자료.(출처=한국산업은행)
▲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통합 추진 산업은행 보도자료.(출처=한국산업은행)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산업은행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통합 추진 사실을 발표하기 전 정부 부처와 사전 조율 작업을 거쳤습니다. 발표 당일 아침 산업경쟁력강화관계장관(산경장) 회의를 열어 각 주무부처와 마지막 논의가 있었죠. 발표 자료도 국토교통부 중심의 정부 합동 자료도 나왔고 산업은행 자료도 함께 배포됐고요.

하지만 언론과의 간담회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과 최대현 산업은행 부행장이 했습니다. 온라인 기자간담회 형식이었죠. 소식통들에 의하면 부처간 조율과 실무자료 작성도 모두 산업은행에서 주로 했다고 하네요.

지난 16일 오전 발표 전 기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부처에서 아시아나항공 매각 사실이 발표되는지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습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발표할 것이다"라든지 "국토교통부가 하는 것 아니냐"는 설이 있었죠. 결국 산업은행이 했지만 이 발표가 은행이 발표하기엔 사안이 매우 중요해서 주요 정부부처가 발표하지 않을까 하는 관측이 있었던 겁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국가항공정책의 대계를 산은이 만들고 발표하나요. 국가항공정책 아닌가요? 채권단이 관리하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간 단순한 구조조정 딜이라고 생각한 건가요?

이미 많은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이 사안을 '구조조정 딜'로 해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적 아젠다라고 봅니다. 그래서 복수민항 체제 폐기 이후의 독점 문제, 민간 기업의 경영권 분쟁에 껴든 정부 스탠스의 정당성 문제, 항공사 수만명의 일자리 문제 등으로 파악하고 있죠. 이 많은 파장들을 산업은행이 홀로 감내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실제 지금도 여론의 역풍을 막아내는데 힘이 부쳐보이고요.

다른 나라 사례를 봐도 국영 항공사 통합 작업에 은행이 앞장서서 대국민 설득을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단순 자금 지원 문제도 은행이 앞장서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일본항공(JAL)은 일본에어시스템(JAS)를 2001년 흡수합병했죠. 민간기업간 합병으로 자체 발표였습니다. 참고로 일본에서도 최근 코로나 사태로 항공사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자 JAL과 전일본공수(ANA)의 통합 얘기가 나왔지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  루프트한자 항공기.(사진=루프트한자코리아 홈페이지)
▲ 루프트한자 항공기.(사진=루프트한자코리아 홈페이지)

독일은 경제부 장관이 나섰죠. 페터 알트마이어 독일 경제부 장관은 올해 4월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적항공사 등 자국 기업들은 위기 이후에도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등 4개국 정부가 유럽 최대 항공사이자 독일 국적항공사인 루프트한자에 국책은행 대출 등으로 공적자금을 지원한다는 계획이 세워진 이후였죠.

프랑스는 재무장관이 나섰습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정부는 에어프랑스-KLM그룹에 110억유로(14조6400억원)의 구제금융을 올해 4월 지원하기로 했는데요. 에어프랑스-KLM그룹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적항공사인 에어프랑스와 KLM이 2004년 합병하면서 출범한 항공그룹입니다. 브뤼노 르 마이어 프랑스 재무장관은 당시 "35만개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한 지원 대책"이라며 "국유화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죠.

각 정부부처가 산업은행에 일을 맡겨둔 것이라면 큰 문제입니다. 반대로 산업은행이 각 부처를 누르고 앞장서고 있다면 그것도 큰 문제고요. 관료들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 있던 과거의 산업은행 위상이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 정부 부처의 위상과 정책의 신뢰성하고도 큰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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