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올해 철강업계는 '암흑기'에 가까운 한해를 보냈습니다. 지난해 철광석 원가가 오르면서 철강사의 원가 부담이 커졌습니다. 전방 산업 침체로 어려움을 겪던 철강업계는 '이중고'를 겪었죠. 올해 코로나19로 철강사의 주요 납품처였던 자동차 공장까지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철강업체들은 '삼중고'를 겪게 됐습니다.

글로벌 5위(조강 생산량 기준) 철강사인 포스코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냈으니 철강업계의 어려움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포스코는 해외 철강사까지 탐낼 정도로 생산 기술이 뛰어납니다. 원가 경쟁력도 뛰어나고, 납품처도 다양한 포스코가 적자를 낸 건 업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죠. 여타 철강사가 겪었을 어려움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철강업계가 고전하고 있는 동안 묵묵히 호실적을 내면서 존재감을 나타낸 철강사가 있습니다. 바로 '범 동국제강그룹'입니다. 동국제강그룹은 2001년 3세 경영 체제에 접어들면서 계열 분리를 단행했습니다. 동국제강그룹과 한국철강그룹 두 개의 철강 그룹이 출범했습니다. 두 그룹 모두 코로나19 때 오히려 안정적인 실적을 내고 있습니다.

동국제강은 'B2B(Business to Business)'인 만큼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도 있습니다. 업력으로는 보면 포스코보다 더 오래된 철강회사입니다.

▲  왼쪽부터 동국제강 창업주 장경호 회장, 장상태 회장, 장세주 현 회장.(사진=동국제강)
▲ 왼쪽부터 동국제강 창업주 장경호 회장, 장상태 회장, 장세주 현 회장.(사진=동국제강)

동국제강은 해방 후 쇠못을 만들던 회사에서 출발했습니다. 창업주인 고 장경호 명예회장은 1949년 재일동포에게 기계를 받아 조선선재라는 회사를 창업했죠. 동국제강은 현재까지 약 60여년 동안 철강 분야만 주력했습니다. 과거 조선업 진출도 꿈꾼 적이 있었지만 접었죠.

동국제강그룹은 3세 승계를 거치면서 계열분리를 겪었습니다. 그룹 경영권은 창업주의 장남인 장상태 회장에 승계됐고, 2대 회장 별세 후 장세주 현 회장에 승계됐습니다. 2001년 2세들은 동국제강그룹에서 떨어져 나가 동국산업과 한국철강그룹을 차렸습니다. 이는 '범 동국제강그룹'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됐죠.

▲  한국철강그룹 지배구조.(자료=금융감독원)
▲ 한국철강그룹 지배구조.(자료=금융감독원)

장상돈 회장이 2017년 별세하면서 한국철강그룹 또한 3세 경영 체제를 맞았습니다. 한국철강그룹은 '장세홍 대표이사→키스코홀딩스→한국철강·환영철강공업·대흥산업'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차남인 장세홍 사장이 그룹 경영권과 한국철강을 맡고 있고, 장남인 장세현 대표이사는 환영철강공업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3남인 장세일 대표는 영흥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철강업계에서는 범 동국제강그룹을 '철강 명가(名家)'라고 일컫습니다. 동국제강은 포스코와 현대제철과 비교해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낮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범 동국제강그룹은 철근과 H형강, 컬러강판 등 다양한 사업에서 쓰이는 원자재들을 생산해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  동국제강 실적 추이.(자료=금융감독원)
▲ 동국제강 실적 추이.(자료=금융감독원)

올해 범 동국제강그룹의 철강 회사들은 코로나 영향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동국제강은 2011년 이후 가장 우수한 경영 실적을 내고 있습니다. 올해 3분기 누적 매출은 3조3977억원, 누적 영업이익은 2075억원을 기록했습니다. 2011년 누적 영업이익은 2843억원(매출 6조6151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올해 영업이익은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죠.

영업이익률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올해 3분기(영업이익률 6.1%)가 2011년(4.2%)보다 높습니다. 포스코(영업이익률 3.1%)와 현대제철(0.05%) 등 여타 철강사와 비교되는 수준이죠.

▲  한국철강 실적 추이.(자료=금융감독원)
▲ 한국철강 실적 추이.(자료=금융감독원)

한국철강도 올해 우수한 실적을 냈습니다. 3분기 누적 매출은 4723억원, 영업이익은 321억원을 기록했습니다. 2016년 이후 실적이 가장 좋았는데요. 2016년 매출은 4815억원, 영업이익은 448억원을 기록했습니다. 환영철강공업은 올해 3분기 누적 매출 3418억원, 누적 영업이익 382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전년 동기와 비교해 영업이익은 40억원 줄었는데, 영업이익률은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영흥은 올해 3분기까지 82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면서 적자였습니다.

범 동국제강그룹의 철강 계열사들은 영흥을 제외하면 사실상 코로나 여파가 없었던 거죠. 올해 경영 실적이 좋았던 이유는 원재료 때문입니다. 범 동국제강 그룹의 철강 계열사들은 전기로에서 쇳물을 뽑아 냅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고로에서 쇳물을 뽑아내죠. 고로 철강사의 원재료는 철광석으로 브라질과 호주에서 전량을 수입합니다. 전기로 철강사는 고철(철스크랩)을 국내외에서 수입하죠. 올해 고철 가격은 비교적 하락세였습니다.

올해 3분기 톤당 고철 가격은 31만원으로 지난해(35만원)보다 12.8% 하락했습니다. 2018년과 비교하면 약 20% 낮은 선에서 거래됐습니다. 빌릿 가격은 3분기 톤당 48만원으로 지난해(58만원)보다 16.7% 가격이 낮아졌죠.

빌릿은 철근과 형강, 봉강 등의 중간 소재입니다. 동국제강과 한국철강 등 전기로 철강사들은 빌릿을 구입해 철강 제품으로 가공합니다.

냉연 원부재료(H/C, 아연 등)의 가격 또한 하락했습니다. 올해 3분기 냉연 원부재료의 가격은  같은 기간 동안 8.2% 하락한 톤당 67만원을 기록했습니다. 주요 원재료 가격이 하락하면서 동국제강 등 전기로 철강사의 수익성이 개선됐죠.

동국제강의 3분기 누적 원가율은 88.7%로 전년 동기(91.0%)보다 2.3% 하락했습니다. 한국철강의 원가율은 같은 기간 7.1% 포인트 하락한 85.5%를 기록했습니다.

올해 봉형강 및 철근 업체들은 감산에 들어갔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수요 둔화 등을 고려한거죠. 이로 인해 봉형강과 철근 제품 가격은 안정적으로 유지됐습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스크랩 가격 하락에도 철근 등 제품 가격은 상승했다"며 "국내 제강사의 감산과 성수기 진입 효과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동국제강은 컬러강판 판매를 늘리면서 수익성을 개선했습니다. 컬러강판은 가전 등의 소재로 활용되는데, 봉형강 등 건자재와 비교해 수익성이 높습니다. 올해 3분기 기준 컬러강판 매출은 1조1759억원으로 전년 동기(누적 매출 1조2314억원)와 비교해 4.5% 하락했습니다. 전체 매출 중 컬러강판 비중은 34.6%로 전년 동기와 비교해 2.6% 포인트 증가했습니다.

▲  범 동국제강그룹 주요 계열사 현금흐름.(자료=금융감독원)
▲ 범 동국제강그룹 주요 계열사 현금흐름.(자료=금융감독원)

올해 범 동국제강그룹의 철강 계열사들은 현금흐름도 개선됐습니다. 투자자들은 현금흐름이 안정적인 기업을 선호합니다. 안정적인 현금흐름은 기업이 외부 금융에 의존하는 정도를 줄여주므로 기업가치를 높인다는 의견도 있죠. 동국제강의 올해 3분기 기준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3280억원으로 전년(637억원)보다 크게 개선됐습니다.

한국철강의 3분기 현금흐름은 672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전년 동기 현금흐름은 마이너스(-) 22억원이었죠. 재무 상태는 한국철강과 환영철강공업이 가장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철강의 부채비율은 14.8%를 기록했습니다. 순차입금은 -3976억원으로 무차입 경영 상태였습니다. 환영철강공업의 부채비율은 8.1%를 기록했습니다.

동국제강의 부채비율은 115.8%로 재무구조가 안정적인 상황입니다. 순차입금은 1조5689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

국내 철강 산업은 대부분 성숙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원가 부담이 높은 데다 전방 산업도 침체된 상황이죠. 범 동국제강그룹의 철강 계열사들은 원가 부담이 낮아지면서 우수한 실적을 냈습니다. 60년의 업력을 바탕으로 위기 대응 능력이 돋보였죠.

하지만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고철값이 조만간 인상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철은 수입 여건이 녹록지 않아 대부분을 국내에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죠. '철강 명가'인 범 동국제강그룹이 성숙기에 진입한 철강시장을 어떻게 타개해나갈지 관심이 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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