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182건. 2019년 대림산업(현 DL이앤씨)이 받은 아파트 하자 민원 건수입니다. 이 중 하자 인정 건수는 129건. 하자 분쟁 건 중 71%에 해당하는 수치죠. 국내 10대 건설사 중 1위입니다. 당시 소송 가액만 146억원에 달합니다. 2000년부터 'e편한세상'을 앞세워 아파트 브랜딩을 선도했지만 입주민들은 불편을 토로했습니다. 최근까지 DL이앤씨는 하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10대 건설사 중 하자 소송 1위라는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BIM은 대림의 건설관리 혁신을 위한 기본 플랫폼이 될 것." 2020년 DL이앤씨는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건설정보모델링) 설계를 내세웠습니다. 업계 최초로 모든 공동 주택의 기획·설계 단계부터 BIM 기술을 적용하겠다고 강조했죠. 그리고 지난해 DL이앤씨는 하자 아파트 브랜드 민원 접수 순위에서 이름을 감췄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일까요. BIM설계와 하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  DL이앤씨 아파트 브랜드 'e편한세상' (사진=DL이앤씨)
▲ DL이앤씨 아파트 브랜드 'e편한세상' (사진=DL이앤씨)

아파트 하자 문제의 대안 BIM 설계


해마다 불거지는 아파트 하자 분쟁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현장 기술 숙련자를 양성하지 못하는 건설업의 구조적 문제, 원가 절감을 위한 하청 업체 단가 후려치기와 이에 따른 저질 건자재 사용, 부실한 공사 감리, 집값과 함께 덩달아 높아진 입주민의 시선, 여론을 증폭시키는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 등 아파트 하자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이 건설업이 처한 현실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자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아파트가 계획대로 지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엔 기술적인 문제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2D 설계 도면을 갖고 수백명이 달라붙어 아파트를 짓는 일은 한계가 명확합니다. 전체적인 프로젝트 관리가 어렵고, 설계 오류와 변경 작업이 빈번하게 일어나 처음 설계와 다른 결과물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BIM은 이 같은 아날로그 방식의 건설 과정을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해 설계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로 고안됐습니다.

▲  BIM은 2D 도면의 한계에서 벗어나 건축물 생애주기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이다. (사진=국토교통부)
▲ BIM은 2D 도면의 한계에서 벗어나 건축물 생애주기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이다. (사진=국토교통부)

BIM은 3D 건축 정보 모델링을 기반으로 시설물의 생애주기를 통합 관리하는 기술입니다. 기획부터 설계, 시공, 유지관리까지 단계별 정보를 통합적으로 관리해 2D 도면 환경에서는 어려웠던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단순히 2D 도면을 3D 모델로 전환하는 것을 넘어 건물이 지어지고 유지·보수 과정을 거치는 건물 생애 주기 동안 데이터의 통합 관리가 BIM 기술 개념의 핵심입니다. 이를 통해 설계 품질과 생산성이 향상되고 시공 오차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체계적인 유지보수가 가능하죠. 아파트 하자 문제를 줄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플랫폼으로써 BIM 강조한 DL


문제는 BIM 기술이 제한적으로만 활용된다는 점입니다. 건설 프로세스 전반이 아닌 설계 과정에 부분적으로 적용돼 건축물 생애주기 통합 관리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설계 과정에만 부분적으로 도입된 BIM 기술은 오히려 현장의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설계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중심으로 고안된 탓에 시각화 면에서는 유리하지만, 현장과 시공성이 고려되지 않아 추가 작업 문제, 커뮤니케이션 문제 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DL이앤씨가 강조하는 부분도 건설 관리 플랫폼으로써의 BIM입니다. 설계 등 특정 단계에만 국한적으로 BIM 기술을 적용하는 게 아닌 설계, 공정, 원가관리 프로세스를 혁신하기 위한 기본 플랫폼으로 도입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모든 아파트, 오피스텔의 기획 및 설계 단계부터 BIM을 적용한다고 발표했죠. 이를 위해 DL이앤씨는 전문가 40여명으로 구성된 BIM 전담팀을 꾸렸습니다.

▲  3D 스캐너와 드론을 활용하여 BIM 설계에 필요한 측량자료를 촬영하는 모습 (사진=DL이앤씨)
▲ 3D 스캐너와 드론을 활용하여 BIM 설계에 필요한 측량자료를 촬영하는 모습 (사진=DL이앤씨)

하지만 기술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는 낮은 수준입니다. 2019년 기준 DL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은 0.89%, 연구개발비 총액 865억5400만원.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는 0.66%(연구개발비 476억9700만원)입니다. 평균 4%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제조업 대비 낮은 수준입니다. 연구개발이 핵심인 삼성전자(8.8%), LG전자(6.5%), 네이버(25.96%), 카카오(15.2%) 등 IT·전자 업계와 비교할 경우 차이는 더 뚜렷합니다. 경기에 쉽게 흔들리는 건설업 특성상 미래보다 당장의 현실이 급급한 탓입니다.

이에 정부는 BIM 플랫폼 구축 등 스마트 건설 기술 연구개발에 2025년까지 약 2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입니다. 또 BIM 기술이 확산될 수 있도록 지난해 공공사업에 BIM 설계 의무화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에는 '건축 BIM 활성화 로드맵'을 발표하고 2025년 BIM 설계 기반 구축, 2030년 디지털 건축 서비스 완전 구현을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아파트 하자 분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하기 위한 장치도 속속 마련되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달 28일 하자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분쟁재정 전담 분과위원회를 신설하는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습니다.

하자 문제는 그동안 건설사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더욱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자의 근본 원인은 결국 계획대로 아파트가 지어지지 않은 데 있습니다. 하자 분쟁에 대한 제도적 개선과 함께 하자 발생에 대한 기술적 맥락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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