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용 후 핵연료를 원전 내부 수조에 임시 보관 중인 모습.(사진=원자력환경공단)
▲ 사용 후 핵연료를 원전 내부 수조에 임시 보관 중인 모습.(사진=원자력환경공단)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탈원전 탈피’ 기조를 강조해왔다. 이는 차세대 원전으로 불리는 소형모듈원자로(SMR)를 중심으로 한 진흥 정책 추진으로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에서 진행됐던 탈원전 정책이 폐지 수순을 밟고 있지만, 여전히 사용 후 핵연료 처리 시설 마련은 숙제로 꼽힌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로 분류되는 사용 후 핵연료는 현재 원자력 발전소(원전)에 임시 보관 중이다. 임시 보관 시설의 포화 시점이 정해져 있음에도 지금까지 마땅한 대책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다.

한국원자력학회는 이 같은 상황을 반영, 사용 후 핵연료 처분장 확보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입장문을 29일 냈다. 이들은 “사용 후 핵연료 처분장의 확보는 원자력 산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탄소중립을 위해 국민의 부담을 덜고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하는 국가가 되기 위한 것”이라며 국회에 조속한 대응을 요구했다. 학회 측은 “사용 후 핵연료 처분장 확보는 정치적 쟁점이 돼서는 안 되고 지속가능한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국가 시설”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원자력학회는 정부의 원전 진흥 정책의 중심이 되는 단체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는 원자력정책발굴단(이하 정책발굴단)을 구성하고 첫 회의를 지난 19일 진행했다. 정책발굴단은 한국원자력학회 소속 산학연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미래 원자력 기술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원자력생태계 구축을 위한 정부지원 체계 마련에 조언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동욱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책발굴단은 원전 진흥을 중심으로 한 연구개발(R&D) 정책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사용 후 핵연료 처분장 확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며 “정부 소통 채널을 통해서도 처분장과 관련된 의견을 전달하고 있지만, 이번 입장문은 국회와 국민께 중요성을 전하기 위해 발표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24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여기서 나온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방폐물)은 현재 원전 내 부지에 마련된 임시보관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 고준위 방폐물이 90% 이상 찬 원전은 10기에 달한다. 고리원전과 한빛원전의 경우 오는 2031년이면 포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원전 활성화 기조에 따라 이용량을 확대할 경우 포화 시점이 2~3년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러나 고준위 방폐물을 영구 처분할 수 있는 시설은 현재 국내에 없다.

2030년을 기점으로 원전 내 고준위 방폐물 임시 보관 시설이 순차적으로 포화 상태가 되는 게 기정사실로 되고 있다. 이는 원전 운영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리스크(위험성)로 꼽힌다. 문제는 그런데도 현재 고준위 방폐물 관리에 관한 정확한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처리는 물론 저장·운반·처분 등의 과정을 안전하게 진행할 제도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아 임시 보관이라는 미봉책만을 유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원자력학회는 “탈원전을 주장하는 독일마저도 탄소중립과 에너지안보를 위해 원전의 가동연장을 검토하는 등 원자력의 지속적 이용은 세계적인 추세에 있다”며 “국회는 사용 후 핵연료 처분장 확보를 위한 특별법을 민생의 관점에서 반드시 제정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원전은 우라늄 핵분열 열을 통해 물을 가열, 증기를 통해 터빈을 가동하는 식으로 전기를 생산한다. 사용 후 핵연료는 핵분열을 끝낸 우라늄 등을 말한다. 폐연료봉이 사용 후 핵연료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원자로에서 막 꺼낸 폐연료봉은 높은 열과 강한 방사선을 배출한다. 이를 3~5년간 물에 담가 열을 식혀주는 과정을 ‘임시저장’이라고 한다. 과기정통부가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말 당시 원전 운영 계획에 따라 추산한 폐연료봉 배출량은 약 3만8400t(경수로 방식 원전 2만6700t, 중수로 방식 원전 1만1700t)에 달한다.

습식 임시보관을 통해 발열량이 떨어진 사용 후 핵연료는 이후 건식 시설에서 40~50년간 저장해야 한다. 이 과정은 중간저장시설에서 이뤄진다. 중간 저장을 거친 사용 후 핵연료는 최종적으로 밀봉 상태에서 땅속 깊이 묻는 식으로 최종 처분된다.

▲ 경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부지 설명 자료.(자료=산업통상자원부)
▲ 경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부지 설명 자료.(자료=산업통상자원부)

우리나라는 원전 내 부지에 임시저장소까지만 구축한 상태다. 지난 2014년 경북 경주 봉길리에 ‘동굴 처분시설’이나 같은 부지에 최근 준공을 시작한 ‘표층 처분시설’인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방폐장·2024년 완공 예정)이 있지만, 이 시설들은 고준위 방폐물을 처분할 수 없다. 원전 작업자의 의류·장갑 등 저준위 방폐물을 보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현재 준공 중인 방폐장은 200L 드럼 12만5000개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완공 후 약 20년간 국내에서 발생하는 저준위 이하 방폐물을 처분하게 된다.

우리나라엔 고준위 방폐물을 50여년간 건식 보관할 중간 저장 시설조차 없다. 중간 저장 시설은 2030년, 최종 처분장은 2060년에 구축이 예정돼 있다. 2030년대부터 임시 저장 시설이 포화상태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준비 기간이 빠듯한 셈이다.

한국원자력학회는 국내 처분 시설 부재가 사회적 수용성 확보하기 어려운 국내 상황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주민 설득이 어려워 부지 선정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점을 걸림돌로 봤다. 이들은 “사용 후 핵연료 처분은 기술적 어려움보다 사회적 수용성 확보의 어려움이 더 크다”며 “사용 후 핵연료 처분장은 영구적인 안전을 위해 사용 후 핵연료를 환경과 차단된 지하 깊숙이 묻어 우리의 생활공간에서 완전히 격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용 후 핵연료는 구리용기에 담겨 찰흙으로 둘러쌓아 암반에 묻히는 식으로 처분된다. 사용 후 핵연료가 여러 단계의 방벽을 뚫고 생태계에 노출되려면 수만년은 걸린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한국원자력학회 측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원자력을 이용하기 위한 처분장을 마련하고 문제가 있다면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며 “기후변화의 위기는 불과 수십 년, 아무리 늦어도 금세기 내에 닥친다고 하는데 사용 후 핵연료 처리는 기후위기 위험과 비교해 대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의 규모가 다르다”고 했다.

이들은 사용 후 핵연료 영구처분장 확보를 위한 특별법이 원전 운영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면서 기후 변화의 대응 방안 마련 측면에서 필요하다고 봤다. 특별법엔 이 때문에 △운영시기를 가능한 앞당길 수 있는 근거 마련 △과학적이고 투명한 절차로 처분장의 지역사회 수용성 확보 △사용 후 핵연료 처분 효율 향상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는 내용 등이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원자력학회는 또 현재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고준위 방폐물 처리 R&D 로드맵에 나온 계획도 앞당길 필요가 있다고 봤다. 해당 계획에 따르면 △2036년 부지확보 △2043년 중간시설 확보 △2060년 심층처분시설 확보를 목표로 104개 요소기술과 343개의 세부기술을 도출한다. 정 교수는 “유럽연합(EU) 택소노미에서도 2050년 사용 후 핵연료 처분장 운영을 요구하고 있다”며 “2060년은 너무 길다. 원자력계가 스스로 채찍질해 시기를 앞당기자는 취지이고 이를 정부와 국회가 지원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제 원전을 시작하는 유럽 국가도 영구 처분 시설의 운영을 2050년으로 잡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보다 더 빨리 기반 시설을 구축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연구 수준 고려하면 2050년까지 사용 후 핵연료 영구처분 시설을 지하에 충분히 구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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