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여행은 의외의 만남이나 사건 등을 통해 다양한 기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어떤 장면은 순간을 갈무리한 듯 오래도록 뇌리에 남기도 한다. [디카폐인]은 여행에서 경험한 인상적인 순간이나 장면을 공유하는 코너다. 여행이 멀어져 버린 지금,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둔 기억의 조각을 꺼내 봤다.

<3>캐나다 가나노퀴

캐나다 오타와에 출장을 갔을 때였다. 귀국 전 하루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평소 가보고 싶던 천 섬(Thousand Islands) 투어를 떠나기 위해 미리 연차를 추가한 상태였다. 세인트 로렌스 강에 있는 1800여 개의 섬들이 만들어내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

특히 가고 싶었던 곳은 하트 섬(Heart Island)이었다. 천 개의 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 하트 섬에는 멋들어진 볼트 성(Boldt Castle)이 자리하고 있다.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체인을 만든 조지 볼트가 지었다고 해서 볼트 성이라 불린다.

▲  하트 섬과 볼트 성 전경 /가나노퀴 보트라인 홈페이지
▲ 하트 섬과 볼트 성 전경 /가나노퀴 보트라인 홈페이지

아내를 너무 사랑한 볼트는 아내를 위한 성을 짓기로 했다. 아내를 공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나. 1900년에 300여 명의 석공을 고용해 하트 섬에서 건축이 시작됐고 4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완공 직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상심한 조지 볼트는 건축을 중단했고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 버려졌던 하트 섬은 1977년에 보수공사를 마친 뒤 관광지로 대중에게 개방됐다. 현재 볼트 성은 로맨틱한 여행지로 이름이 나 있다. 귀국 전 하루의 여유 시간을 천 섬 유람에 쓰기로 했다.

▲  가나노퀴에 있는 환영 간판 /김명상 기자
▲ 가나노퀴에 있는 환영 간판 /김명상 기자

가까운 페리 터미널은 가나노퀴(gananoque)라는 곳에 있었다. 오타와역에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나자 마음은 벌써 천 섬을 향해 출항하고 있었다.

여행 당일. 뭔가 꼬였다는 것은 목적지인 가나노퀴 역에 내린 직후였다. 역은 역인데 상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마치 초원에 홀로 선 간이역에 내린 기분이었다. 페리 터미널로 가는 교통수단은커녕 상가나 주택도 없었다.

▲  썰렁한 가나노퀴역 주변 풍경 /김명상 기자
▲ 썰렁한 가나노퀴역 주변 풍경 /김명상 기자

마침 같이 내린 백인 여자에게 물어보니 여긴 아무것도 없다며 콜택시를 불러야 한단다. 볼트 성으로 가는 마지막 페리 출항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같이 택시를 타고 비용을 나누자고 했더니 흔쾌히 응한다. 하지만 콜택시를 기다리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페리 터미널. 허겁지겁 달렸지만 아뿔싸. 마지막 페리가 방금 떠나가고 있었다. 멀지도 않았다. 헤엄쳐서 올라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혹시나 싶어 매표소에 가서 물었지만 저게 오전의 마지막 페리란다. 오후 3시에도 볼트 성에 가는 페리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걸 타면 돌아가는 저녁 기차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내일은 귀국이라 하루 더 머물 수도 없다. 말 그대로 끝이었다.

허망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목표했던 여행지를 갈 수 없다니. 터미널 주변에 있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멍 때리고 있었다. 마지막 페리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녕 천 섬. 안녕 볼트 성. 언제 다시 널 볼 수 있을까.

불운을 탓하며 자세히 조사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멍멍이 한 마리가 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명견 래시'를 떠올리게 하는 콜리 종의 귀여운 강아지였다. 산책하던 아주머니는 줄을 끌어도 개가 따라오지 않자 “He's curious about you(얘가 널 궁금해한다)”라며 웃었다. 멍멍이는 마지막 페리를 놓친 내 모습이 웃겨서 쳐다본 것일까.

▲  페리를 놓친 후 만난 아주머니와 강아지 /김명상 기자
▲ 페리를 놓친 후 만난 아주머니와 강아지 /김명상 기자

할 일도 없는 터라 동네 구경이나 하고 싶었다. 이 주변에 가볼 만한 곳이 있냐고 물었지만 아주머니는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낫씽”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주택가라서 관광객이 다닐 만한 곳은 없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강아지는 순하고 무척 귀여웠다. 아주머니에게 개랑 같이 산책해도 되냐고 묻자 활짝 웃으며 좋다고 하신다. 묘한 동행의 시작이었다.

배를 놓친 동양인 관광객을 위로하려는 듯 아주머니는 중간 중간 무슨 전투가 여기서 일어났다는 등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줬다.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였겠지만 거의 못 알아들었다.

앞서가던 강아지는 여기저기를 킁킁대고 다녔다. 녀석은 나의 일일 가이드였다.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개를 따라가다 아, 하고 놀라버렸다. 생각지 못했던 풍경이 있었다.

▲  가나노퀴에서 만난 주택 /김명상 기자
▲ 가나노퀴에서 만난 주택 /김명상 기자

햇살은 따사롭고 초록이 짙은 거리였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한 주택과 아름드리나무들이 보였다. 미국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장면 안에 쏙 들어간 기분이었다.

▲  가나노퀴 거리의 상점들 /김명상 기자
▲ 가나노퀴 거리의 상점들 /김명상 기자

작고 조용한 마을에는 알록달록 칠한 상가들도 있었다. 작지만 이국적인 정취를 가득 품은 곳을, 낯선 아주머니와 개를 벗 삼아 산책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강아지가 가이드를 해준 마을 투어 도중 난 많은 사진을 찍었다. 곳곳이 인상적이었다. 아주머니는 뭘 그런 걸 찍느냐는 듯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  가나노퀴 타운홀 /김명상 기자
▲ 가나노퀴 타운홀 /김명상 기자

한참 돌다 보니 헤어질 시간이 됐다.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인사하던 아주머니는 마지막으로 동네에서 제일 맛있다는 카페를 소개해줬다. “너 같은 여행객에게 딱”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고였다. 카페의 식탁은 여행용 캐리어를 쌓아 만든 것이었다. 1900년대 중후반에나 쓰였을 듯한 오래된 캐리어는 본연의 임무를 마치고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창가에 놓인 캐리어 식탁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시원한 커피를 즐겼다. 일품이었다. 머물고 있는 오타와의 5성급 호텔의 커피보다 몇 배는 더 맛있었다. 카페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진 커피 맛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  여행용 캐리어를 쌓아 만든 카페 테이블 /김명상 기자
▲ 여행용 캐리어를 쌓아 만든 카페 테이블 /김명상 기자

안에도, 밖에도 동양인은 나밖에 없었다. 잘 계획된 여행만 해오던 내게 오늘 하루는 일대 사건이었다. 카페 최고의 명당에 앉아 상념에 젖었다. 가고 싶은 관광지를 가지 못했다. 망했다고 생각했을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강아지 가이드와 실컷 산책하고, 멋진 거리를 만나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취향을 완전 저격하는 카페에서 캐나다 최고의 커피를 맛보고 있다. 정신 승리일까. 뭐, 아무렴 어떠랴.

▲  카페 내부 전경 /김명상 기자
▲ 카페 내부 전경 /김명상 기자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문득 오늘 여행이 인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둔 길만 갈 필요도, 갈 수도 없다. 때로 인생에는 돌발 사건이 벌어지며, 그것은 우리를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끌기도 한다. 열차 선로처럼 정해진 길로만 향하는 인생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이상했다. 페리를 놓치던 순간의 아쉬움이 사라져 버렸다. 볼트 성이 빠진 마음속 빈자리는 어느새 다른 무언가로 꽉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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