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환경보호 및 소비자 권익 향상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가 여러 지역에서 법제화되는 추세다.

수리할 권리는 모든 소비자가 구입한 제품의 수리 방법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제조업체는 수리 접근성을 높여 누구나 원하면 제품을 수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2018년 17개 주에서 수리할 권리의 법제화 논의가 시작됐고 2019년에는 관련 청문회도 열렸다. 이어 올해 7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전자기기 제조업체들의 수리 제한 관행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함으로써 수리할 권리가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다.

▲ 아이픽스잇에 게시된 아이폰13 분해 수리 강의 (자료=유튜브 갈무리)
▲ 아이픽스잇에 게시된 아이폰13 분해 수리 강의 (자료=유튜브 갈무리)

이에 폐쇄적인 수리 정책으로 유명한 애플도 최근 아이폰13 수리 정책을 일부 바꾸기로 했다. 미국의 자가수리법 공유 사이트 '아이픽스잇(iFixit)'에 따르면 애플은 지난 9월 출시한 아이폰13에 디스플레이와 연결되는 마이크로 컨트롤러를 추가했다. 애플은 이 부품과 디스플레이가 연결되지 않으면 '페이스ID(애플의 얼굴인식 보안기술)'가 비활성화되도록 했는데, 이 조치는 많은 수리점의 반발을 샀다. 연결 작업에 필요한 전용 도구를 애플이 공식 서비스센터와 애플 인증 수리점에만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조치는 수리할 권리에 위배된다는 지적을 받았고 애플은 일보 후퇴했다. 추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컨트롤러와의 연동 없이도 페이스ID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단 것이다.

수리할 권리가 필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제조사의 독점적인 수리 정책으로 소비자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다른 하나는 버려지는 기기를 줄어야 환경오염도 최소화된다는 것이다.

만약 제품 수리와 관련된 부품 공급, 가격 정책을 제조사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경우 소비자들은 공정한 수리 서비스를 받기 어려워진다. 제조사가 턱없이 높은 수리비를 청구해 마진을 챙겨도 이를 대체할 채널이 없고, 결국 기기 수리를 포기하거나 제품을 새로 구입하게 된다.

반대로 수리가 쉬워지면 제품의 평균 수명이 늘고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도 줄일 수 있다. 유럽환경국에 따르면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 수명이 1년 증가할 경우 매년 210만톤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줄어든다. 이는 내연기관 자동차 100만대가 1년 동안 배출하는 온실가스와 같은 양이다.

제조사들은 비공식 수리점이나 비전문가가 제품을 수리할 경우 저작권 침해, 개인정보 유출 등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수리할 권리를 반대한다. 하지만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는 해당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 오히려 기업은 제품을 더 쉽게 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20년 유럽연합(EU)도 소비자들이 전자기기 부품을 사설업체에서도 살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역시 소비자들의 수리할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함이다. EU는 제조사들이 수리용 부품을 최소 10년 동안 단종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같은 기간 수리 매뉴얼도 의무적으로 제공하도록 했다. 향후 수리할 권리의 법적 구속력이 더 강해지면 사설 부품으로 수리한 제품의 수리를 거부하는 제조사들의 관행에도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한편 최근 국내에서도 수리할 권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국회 부의장은 이용자의 휴대폰 수리 권리를 보장하는 '소비자 수리권 보장법'을 대표 발의했다. 이는 제조사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수리용 부품 공급을 거절하거나 제한하는 행위, 수리를 방해하는 소프트웨어 설치 등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이를 위반 시 방송통신위원회가 시정 명령이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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