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 대한전선 당진공장. (사진=대한전선)
▲ 대한전선 당진공장. (사진=대한전선)

테슬라와 쿠팡이츠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각자의 방법으로 기존 업체 점유율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죠. 테슬라는 ‘전기차·자율주행’ 아이템으로, 쿠팡이츠는 ‘단건 배달’ 아이템으로 굳어있던 시장을 녹여버렸습니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는데요. 이전엔 못 본 '신선한 전략'이라는 거죠.

국내 전선업계도 과거 자동차 업계와 배달 업계 만큼이나 굳어 있습니다. 주요 업체는 LS전선, 대한전선, 가온전선 3곳인데요. 가온전선 최대주주가 LS전선(46.6%)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2파전입니다. 대한전선은 2009년 LS전선에 매출액을 따라잡힌 뒤 힘을 못 쓰고 있죠.

그런데 이 시장에 호반산업이 뛰어들었습니다. 호반산업은 지난 3월 말 대한전선 최대주주인 IMM PE의 보유 주식 전부(40%)를 2518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호반산업은 인수 목적을 사업 다각화라고 설명했죠.

호반이 뛰어든 전선업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요. 또 호반이 말하는 사업 다각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정확한 ‘대한전선 활용법’ 예상은 어렵지만 공개된 수치와 정보로 짐작해 볼 수는 있겠죠.

벌어지는 격차

국내 전선업계 3인방은 LS전선, 대한전선, 가온전선으로 꼽힙니다. 이중 대한전선과 가온전선은 각 사의 ‘별도 재무제표 매출액’을 기준으로 사업보고서에 시장점유율 추이를 밝힙니다. 참고로 재무제표엔 연결, 별도 두 가지가 있는데요. 쉽게 생각하면 연결은 우리 가족의 가계부고 별도는 나만의 가계부입니다. 

▲ 3사 매출액 비교. (출처=대한전선 사업보고서)
▲ 3사 매출액 비교. (출처=대한전선 사업보고서)

대한전선은 2000년대 초반까지 부동의 전선업계 1위였습니다. 하지만 2004년 창업 2세 고(故) 설원량 전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전문경영인으로 선임된 임종욱 전 사장의 무리한 건설업 투자로 대한전선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LS전선과 엎치락뒤치락하던 대한전선은 2009년 LS전선에 매출액을 따라잡힙니다. 이후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집니다. 대한전선 매출액은 전년도와 비슷한 수준인데 LS전선 매출액은 25%씩 늘어났죠.

벌어들인 돈은 모두 빚을 갚는데 쓰였습니다. 대한전선 순차입금은 2004년 말 7367억원에서 2009년 말 2조2020억원까지 늘었습니다. 순차입금은 기업이 빌린 돈(차입금)에서 보유한 현금을 뺀 수치입니다.

대한전선이 구조조정 등 어려움을 겪는 사이 LS전선은 사업을 확장합니다. 본격적인 투자에 나서죠. 투자활동 현금흐름은 2010년 1313억원에서 2011년 마이너스(-) 3553억원으로 변합니다. 투자활동 현금흐름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는 건 설비투자, 금융투자에 쓰이는 비용이 증가했음을 의미합니다.

더군다나 업계 3위 가온전선 최대주주가 LS전선(46.6%)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한전선과 LS전선의 점유율 격차는 더 커집니다. 

호반의 토털 솔루션

대한전선을 품은 호반이 전선업계에 꺼내든 카드는 ‘토털 솔루션’입니다. 대한전선은 오는 18일 대한전선 당진공장 대강당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여는데요. 의안은 총 4개, 안건은 총 16개죠. 눈여겨볼 안건은 ‘영문 상호 변경 건’과 ‘사업 목적 추가 건’입니다.

영문 상호는 'Taihan Electric Wire Co., Ltd.'에서 'Taihan Cable&Solution Co., Ltd.'로 변경됩니다. 대한전선은 주총 소집공고에 변경 목적을 적어뒀는데요. “케이블을 넘어 토털 솔루션(Total Solution)을 제공하는 비즈니스 방향성 및 추가 사업확장성 고려”라고 안내돼 있습니다. 

▲ 18일 열리는 임시주주총회 안건 중 일부. (출처=대한전선 주주총회 소집 공고)
▲ 18일 열리는 임시주주총회 안건 중 일부. (출처=대한전선 주주총회 소집 공고)

토털 솔루션이 뭘까요. 업계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사명 변경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턴키(Turn Key) 사업 확대’를 뜻한다는 거죠. 전선업계에서 턴키는 단순한 케이블 납품에서 그치지 않고 고객사가 설계부터 엔지니어링, 토목 공사까지 모든 시공·관리를 맡기는 수주 방식을 말합니다.

대한전선은 LS전선 등 다른 업체와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턴키 방식의 사업을 수주하고 있습니다. 이 해석이 맞다면 영문명 변경은 단순히 이를 강화하겠다는 의지인 거죠. 지난해 공시(단일판매·공급계약)된 해외 수주 금액의 총합은 2310억원입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토털 솔루션은 시장을 뒤흔들 ‘신선함’과 거리가 있습니다. 턴키 사업 확대는 2010년대 초중반부터 경쟁사 LS전선이 외치던 구호거든요. 구자엽 LS전선 회장은 2015년 ‘LS전선 Way’ 선포식에서 “단순히 케이블 제품 공급회사가 아닌 엔지니어링과 시공 등 솔루션 제공 기업 역량을 강화해 글로벌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겠다”고 강조하기도 했죠.

그렇다면 호반의 진정한 토털 솔루션은 추가될 사업 목적과 관련 있을까요? 대한전선은 주택건설업과 부동산개발업을 추가할 예정인데요. 사업 목적 추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전선 관계자는 “계열사 간 시너지 확대 측면”이라고 답했습니다. 어떤 시너지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는 질문엔 “정해진 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주택건설업은 쉽게 말해 시행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자격증입니다. 시행사는 건설사업을 총괄하는 주체죠. 아파트 건설을 예로 들겠습니다. 시행사는 계약부터 입주까지 모든 과정을 관리합니다. 시공사는 시행사의 발주를 받아 공사를 담당하죠. 또 다른 사업 목적인 부동산개발업은 공급 목적의 부동산 개발 업무를 뜻합니다. 추가되는 사업 목적 2개 모두 건설업 관련인거죠.

대한전선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일단 해외 턴키 사업 확대는 무관합니다. 이미 사업 목적에 해외종합건설업, 해외건설 용역업 및 공사업이 있기 때문이죠. 국내 턴키 사업 확대는 말이 안 됩니다. 국내 전력망 사업은 턴키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거든요.

결국 대한전선이 사업 목적 추가 및 토털 솔루션으로 얻는 이득은 국내에서 호반그룹과 시너지로 보입니다. 호반산업은 이번 인수로 얻을 게 많죠. 당장 해외시장 공략을 본격화할 수 있습니다. 대한전선이 수년간 쌓은 해외 매출처를 공략해 해외수주를 이뤄낼 수 있는 거죠.

대한전선은 1분기 영업익 17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전년 동기 대비 79% 줄어든 수치입니다. 좋지 않은 성적표를 들고 새로운 주인을 만난 대한전선. 대한전선은 어떤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을까요. 호반과의 시너지에 힘입어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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