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최근 통신 업계에서는 지난 5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언급됐던 오픈랜(Open-Radio Access Network)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현재 통신사들은 특정 장비 제조사로부터 공급받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기지국 구축에 활용합니다. 가령 SK텔레콤이 5G 기지국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양이나 기능을 노키아에게 전달하면 노키아는 그에 맞는 제품을 제작해 SKT에게 공급하는 방식이죠.

오픈랜은 단어 그대로 무선 접속 네트워크에서 개방형을 지향합니다. 통신사와 장비 제조사들이 무선 기지국에 필요한 각종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개방형 표준을 만듭니다. 그 표준을 지킨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는 장비 제조사와 관계없이 각 기지국을 구축하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해 각 통신사의 상황에 맞게 기술을 유연하게 활용하자는 취지로 탄생했습니다.

SKT의 5G 기지국에 노키아의 장비와 네트워크 전문 A기업의 소프트웨어가 함께 장착될 수 있는 셈이죠. 자동차를 예로 들어볼까요? A 제조사의 자동차 뼈대에 핵심 부품인 엔진만 A사의 제품을 쓰고 나머지는 B사와 C사의 제품을 결합해 조립하는 방식입니다.

▲ 사진=오픈랜 얼라이언스 홈페이지
▲ 사진=오픈랜 얼라이언스 홈페이지
현재 전세계 통신장비 시장은 화웨이가 선두 주자입니다. 화웨이는 자국이자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을 발판으로 동남아·아프리카에 이어 유럽까지 통신 장비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에릭슨과 노키아가 화웨이를 추격하며 3강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이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죠. 주요 장비 제조사들은 각국의 주요 통신사들에게 장비를 제공하며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통신 서비스는 끊기지 않고 24시간 서비스되어야 하기에 성능이나 보안 측면에서 지극히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통신사들은 한번 도입한 기지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다른 제조사의 제품으로 잘 바꾸지 않습니다. 통신 서비스가 안정적으로 잘 되고 있는데 굳이 다른 제품을 도입해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주요 장비 제조사들이 기존 고객인 통신사들을 대상으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픈랜이 도입되면 어떻게 될까요? 장비 제조사 입장에서는 매출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기존에는 통신사에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공급했는데 소프트웨어 중 일부는 다른 기업의 제품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요 장비 제조사들은 오픈랜이 도입되는 것에 대해 신중한 입장입니다.

하지만 오픈랜 도입에 적극적인 곳도 있으니 바로 노키아입니다. 노키아는 오픈랜을 위한 표준을 만드는 글로벌 통신사 및 제조사들의 모임인 오픈랜 얼라이언스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키아가 오픈랜에 긍정적인 것은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들이 오픈랜 도입에 적극 나선 것이 첫 번째 이유로 꼽힙니다. 전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선진국들이 오픈랜에 적극 나선다면 각국의 통신사들은 오픈랜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어차피 갈 수밖에 없는 시장이라면 남들보다 미리 준비하겠다는 것이 노키아의 계산입니다. 현재 글로벌 통신 장비 시장에서는 화웨이와 에릭슨이 노키아보다 앞서 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오픈랜 시대를 먼저 준비해 한 발 앞서가겠다는 전략입니다.

또 노키아는 오픈랜으로 인해 통신 장비 시장의 전체 크기가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가령 노키아의 장비에 다른 중소기업의 소프트웨어가 적용된 기지국이 스마트시티에 도입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된다면 노키아로서는 통신사뿐만 아니라 또 다른 매출원을 갖게 됩니다.

이준성 노키아코리아 최고기술책임자(CTO) 전무는 "노키아나 에릭슨같은 기업이 모든 상황에 맞는 기지국 장비를 만들순 없다"며 "대기업이 최고급과 중상급의 장비를 만든다면 그 사이에 해당하는 기능을 갖춘 장비에 들어갈 소프트웨어는 다른 중소기업이 공급한다면 기존보다 여러 기업에게 기회가 돌아가 또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노키아는 상용 장비와 같은 상황에서 오픈랜에 대한 테스트도 진행했기 때문에 오픈랜 도입에 준비가 됐다는 입장입니다. 이 CTO는 "오픈랜에서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개발 플랫폼을 보유했다"며 "노키아는 오픈랜 얼라이언스에서 핵심인 디지털유닛(DU)·라디오유닛(RU)과 라디오 컨트롤러 관련 분과의 좌장도 맡으며 기술 표준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반면 전세계 통신장비 시장 1위 화웨이는 오픈랜에 대해 신중합니다. 현재 장비 제조사들이 각 통신사들의 요구사항에 맞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설계해 공급하고 있는데 다른 기업들의 제품이 함께 기지국에 들어간다면 성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합니다.

오픈랜 얼라이언스에서 마련한 표준에 따라 소프트웨어를 구축한다면 성능을 고도화하는데에도 기존보다 제약이 따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만약 화웨이의 장비와 B 중소기업의 소프트웨어가 한 기지국에 들어갔는데 서비스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책임 소재를 가리기도 쉽지 않겠죠. 이러한 우려들로 인해 화웨이는 오픈랜이 과연 기지국의 어떤 부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 지켜보는 입장입니다. 화웨이는 오픈랜 얼라이언스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통신사 입장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합니다. 통신사들은 1G부터 5G까지 통신 서비스를 공급하면서 많은 노하우가 쌓였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알고리즘을 기지국에 적용하고 싶은 욕구도 있습니다. 서울 강남역을 예로 들어본다면 평일 출퇴근 시간에는 특히 인파가 몰려 주변 기지국 장비의 사양이 매우 높아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많은 데이터의 송수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평일 늦은 밤이나 명절 연휴라면 상황이 다르겠죠. 이때는 강남역 인근 기지국의 성능을 상대적으로 감소시키고 다른 기지국으로 그 여력을 쏟아부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상황에 맞는 기지국 운영이 오픈랜으로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통신사들은 설비투자(CAPEX)액도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SKT·KT·LG유플러스 등 국내 통신사들은 오픈랜 얼라이언스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오픈랜은 선택할 수도 있는 방안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것처럼 기존에 구축한 기지국에 변화를 줘야 하는 것이므로 통신 서비스에 위험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내 통신사들은 지난 2019년 4월 전세계 최초로 5G 상용화에 성공한 이후 수도권과 주요 광역시의 상당 지역에는 5G 기지국을 구축한 상태입니다. 상대적으로 5G망 구축 속도가 느린 미국이나 일본이 오픈랜을 도입하기에 오히려 유리한 상황인거죠.

각 국의 통신사 및 제조사들이 오픈랜을 준비하고 있지만 일반 소비자들이 오픈랜이 도입된 기지국을 통해 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점은 빨라야 2~3년 후가 될 전망입니다. 자율주행과 스마트팩토리, 스마트시티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상용화됐을 때 오픈랜이 통신사·제조사·소비자에게 기존보다 얼마나 큰 가치와 효요을 가져다 줄지 궁금증이 커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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