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2030년까지 육·해상을 아우르는 '수소 밸류체인'을 구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글로벌 1위의 조선사와 국내 2위(주유소 수 기준) 정유회사에서 안주하지 않고, 미래 에너지인 '수소'를 사업화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담대한 포부'를 세웠죠.

우주에서 가장 흔하지만, 상용화하기 가장 어려운 수소를 주력으로 생산해 저장·활용하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수소 경제를 이끌 '1군 선수'들은 현대오일뱅크와 한국조선해양입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3월 "두 계열사를 중심으로 전사적 기술과 인프라 역량을 총결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현대오일뱅크는 수소 생산과 육상 부문의 유통을 맡고, 한국조선해양은 해상을 통한 수소 유통과 활용을 맡을 계획이죠. 한국조선해양은 수소 추진선과 수소 운반선을 개발 중에 있습니다. 두 회사는 수소 생산과 저장, 활용 기술을 개발해 그룹의 수소 시대를 열 특명을 받았죠.

먼저 현대오일뱅크의 수소 사업부터 들여다 보겠습니다.

▲ 정기선 부사장(왼쪽)과 아민 알 나세르 아람코 사장(오른쪽)이 2016년 합작 조선소 건설 예정부지에서 만났다.(사진=현대중공업그룹)
▲ 정기선 부사장(왼쪽)과 아민 알 나세르 아람코 사장(오른쪽)이 2016년 합작 조선소 건설 예정부지에서 만났다.(사진=현대중공업그룹)

수소 에너지, 사업화까지 '산 넘어 산'

현대오일뱅크의 수소 포트폴리오는 비교적 단촐합니다. 수소를 생산해 수요처에 공급하고, 주유소 내 수소충전소에 공급하는 것입니다. 수소를 만들어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게 전부입니다. 포트폴리오는 비교적 단순한 반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유는 수소가 필요한 수요처가 많지 않은 데다 생산량이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오일뱅크의 매출에 크게 기여하지는 않을 전망입니다. 이유는 현대오일뱅크가 2020년 기준 13조원의 매출을 올린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수만톤을 생산해야 수천억원의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갈 길이 멀고 또 험할 전망입니다.

▲ 현대제철의 당진 수소공장.(사진=현대제철)
▲ 현대제철의 당진 수소공장.(사진=현대제철)

현대오일뱅크보다 한 발 앞서 수소 판매를 시작한 현대제철을 예로 들어보죠. 현대자동차그룹의 철강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지난 4월 열린 1분기 컨퍼런스콜에서 부생수소 생산량을 확대할 경우 수익화가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현대제철은 "부생수소 생산량은 연간 3500톤이며, 수익은 아직 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업계에 따르면 현대제철은 전체 수소 생산량 중 70% 가량을 외부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약 2000톤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는데, 매출 추정치는 약 200억원입니다. 현대제철은 2020년 기준 18조원의 매출을 올린 철강사입니다. 현대제철이 수소 판매로 벌어들인 매출은 전체 매출의 0.11% 수준으로 극히 미미합니다.

현대제철이 생산한 부생수소는 판매할 곳이 여럿 있습니다. 현대제철은 한국중부발전, 중소기업은행과 합작으로 부생수소 발전소(현대그린파워)를 운영 중입니다. 현대제철의 모기업인 현대자동차는 수소전기차(FCEV)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현대제철의 수소생산량으로 하루 1300대, 연간 47만대의 수소전기차를 충전할 수 있죠.

현대차그룹은 수소 충전소 특수목적법인인 수소네트워크(이하 하이넷)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현대제철이 생산한 부생수소는 하이넷에 공급되고 있습니다.

현대오일뱅크는 현재까지 수소를 외부에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세계 3대 천연가스 생산회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에서 LPG를 받아, 블루수소(이산화탄소를 포집한 수소)를 생산할 계획입니다. 현재 부생수소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2025년까지 10만톤 규모로 확대할 예정이죠.

현대오일뱅크는 차량 및 발전용 연료로 블루수소를 판매할 계획이며, 2030년까지 블루수소와 화이트바이오, 친환경 화학·소재 사업의 영업이익 비중을 70%까지 높일 계획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입니다.

현대오일뱅크가 내세운 생산량 목표치는 아람코가 있는 한 불가능한 수준은 아닙니다. 다만 이를 수익화해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 경우 얘기가 달라집니다.

▲ 수소전기차 판매대수 추이.(자료=SNE리서치)
▲ 수소전기차 판매대수 추이.(자료=SNE리서치)

국내 수소전지차 시장은 판매대수가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지난해 글로벌 수소차 판매대수는 9500대로 전년(1만700대)보다 11.3% 줄었습니다. 국내 발전용 연료전지 시장은 2017년 251MW에서 2030년 746MW로 197% 성장이 예상됩니다.

수소 에너지 시장에는 낙관론과 신중론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현대오일뱅크는 하이넷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으며, 수소 연료전지 사업도 영위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소 연료전지 시장에는 두산퓨얼셀이 압도적 점유율을 갖고 있고, 포스코 계열사인 한국퓨얼셀과 블룸SK퓨얼셀 등이 있습니다. 수소 연료전지 사업자가 수소 에너지 공급에도 우위를 점할 것으로 보이죠.

수소 사업 위한 현대오일뱅크 IPO..."목적도 계획도 명확해야"

현대오일뱅크는 '탈정유' 사업을 위해 IPO를 추진 중입니다. 수소 사업과 친환경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IPO를 추진 중이라는 게 시장의 설명이죠.

현대중공업그룹의 계열사인 점과 현금창출력이 우수한 정유업인 점을 고려하면 현대오일뱅크의 IPO는 흥행이 전망됩니다. 이전 IPO를 추진하면서 2차례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지만, 이번은 다를 가능성이 크죠. 문제는 무엇을 위한 IPO인지 하는 점입니다.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현대오일뱅크는 IPO를 통해 약 3조5000억원의 자금을 확보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오일뱅크는 IPO를 통해 최대 44.13%의 지분을 팔 수 있는데, 주당 3만3000원으로 환산한 금액이죠.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지주는 현대오일뱅크 지분 74.13%를 보유하고 있는데, 최대주주는 IPO 후 최소 30%의 지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현대오일뱅크의 수소 연료전지 업체 인수 재원 마련 방안.(자료=사업보고서)
▲ 현대오일뱅크의 수소 연료전지 업체 인수 재원 마련 방안.(자료=사업보고서)

3조5000억원은 현대오일뱅크가 신사업에 진출하기 충분한 금액입니다. 현대오일뱅크의 수소 생산공장은 LPG를 원료로 수소를 추출하는 공장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앞서 언급했듯 판매처가 없이 수소를 생산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무작정 수소 생산공장만 만들 경우 납품처가 없어 재고만 쌓을 수 있죠. 

앞서 현대중공업그룹은 운송용, 발전용 수소 외에 건설기계 등에 수소 연료전지를 탑재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려면 수소 연료전지 업체를 인수합병하는데 투자금 중 상당 금액을 써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SK그룹처럼 해외 수소 연료전지 업체와 합작사를 설립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수소 경제의 전망이 밝아지면서 수소 연료전지 기업의 기업가치는 이전보다 크게 높아졌습니다. 무엇이 됐든 현대오일뱅크는 수소 연료전지 기업과 '혈맹'을 체결하는데 주력해야 하죠. 

현대오일뱅크는 2019년 아람코와 프리IPO를 통해 1조3749억원을 확보했습니다. 아람코와 '혈맹'으로 현대오일뱅크의 정유 사업은 이전보다 경쟁력이 높아졌고, 수소 원료인 LPG까지 안정적으로 공급받기로 했죠.

▲ 현대중공업그룹 수소 밸류체인 확대 방안.(자료=현대중공업그룹)
▲ 현대중공업그룹 수소 밸류체인 확대 방안.(자료=현대중공업그룹)

이번 IPO로 현대오일뱅크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그룹의 수소 사업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대오일뱅크가 IPO로 확보한 자금으로 수소 연료전지 업체 M&A 등에 성공할 경우 그룹의 수소 사업 경쟁력은 크게 높아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건설기계와 초대형 선박 등에 수소 연료전지를 탑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IPO 흥행을 위해 수소 사업을 활용했다는 비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현대오일뱅크가 수소 사업의 전략을 최대한 구체화시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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