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암호화폐, 코인)사업자 신고 조건을 채우지 못한 중소 거래소들이 줄폐업할 경우 투자자들이 입을 잠재적 피해 규모가 최소 3조원 이상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업계 전문가들은 시장에 4대 거래소(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만 남아도 괜찮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며, 정부가 지금이라도 중소 거래소들에게 공평한 경쟁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9일 한국디지털자산사업자연합회가 주관하고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한국핀테크학회 등이 주최한 '가상자산거래소 줄폐업 피해진단과 투자자 보호 대안' 포럼에서는 국내 중소 가상자산거래소들의 폐업 부작용을 연구한 첫 조사결과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 사진=포럼 갈무리
▲ 사진=포럼 갈무리

이날 김형중 고려대 특임교수 겸 한국핀테크학회장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7일 기준 코인마켓캡에 등재된 '김치코인(한국인이 만들고 원화 거래 비중이 80% 이상인 코인)' 수는 총 112개이며 시가총액은 한화 9조원에 달한다.

이 중 4대 거래소에 중복 상장된 코인 70개를 제외하면 시가총액 규모로 3조원, 42개의 코인이 중소 거래소에서 유통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만약 24일까지 이들 거래소의 사업자 신고가 불발될 경우 투자자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또 코인마켓캡에 등재되지 않아 이번 조사에 포함되지 못한 코인 수십종을 합하면 실제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예측된다.

김 교수는 "한 국회의원은 4대 거래소가 국내 시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들의 신고만 수리해도 괜찮은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다"며 "일거래금액만 볼 때 그럴 뿐, 4대 거래소에 모든 코인이 상장돼 있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7일 기준 4대 거래소의 국내 일일 거래량 점유율은 총 91.5%(업비트 76.1%, 빗썸 12.1%, 코인원 2.9%, 코빗 0.4%)로 사실상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날 참석한 다른 전문가들도 4대 거래소가 모든 코인을 상장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은행이 거래소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상장 코인의 수를 평가하는 항목도 포함돼 있어 현시점에서 추가 상장도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 국내 주요 거래소 일일 거래규모 순위 (자료=김형중 교수)
▲ 국내 주요 거래소 일일 거래규모 순위 (자료=김형중 교수)

업계, 기회 주지 않는 정부·은행에 날선 비판 
이날 지정토론회에서는 폐업 기로에 놓인 거래소 대표들, 현상황의 불공정함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각자의 의견을 발표했다.

김형묵 금융소비자연맹 연구위원은 "정상적인 개발사가 론칭한 코인이고 프로젝트 진행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점을 고려해 투자한 코인이 거래소의 반강제적 폐업으로 거래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금융 소비자에 대한 명백한 권리 침해"라며 "이는 정부의 잘못된 가이드라인으로 야기될 피해이므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서 사업 중인 거래소는 특정금융정보법(이하 특금법)에 따라 24일까지 ISMS(개인정보보호체계) 인증과 시중은행과 계약한 실명입출금 계좌를 발급받아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사업 신고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자체 노력으로 획득 가능한 ISMS와 달리 은행 실명계좌는 은행이 직접 거래소 평가 후 발급하는 방식인데, 은행이 가상자산에 부정적인 정부 눈치에 이를 틀어막고 있다는 점이다.

임요송 코어닥스 대표는 "여론은 능력 없는 거래소가 떠나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ISMS를 취득한 거래소들이 자금세탁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며 "그런데도 금융당국은 은행에 가상자산 사업자의 위험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은행이 어떻게 실명계좌를 내어줄 수 있겠냐"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도현수 블록체인진흥협회 가상자산사업자 위원장도 "빗썸과 코인원만 해도 최근 농협과 트래블 룰로 마찰을 빚었지만 협의를 통해 실명계좌 재발급에 성공했다. 반면 다른 거래소들은 은행에 찾아가도 심사 요건조차 안내를 받지 못하는 불공정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철이 포블게이트 대표는 "정부가 하라는 건 다 했고 직접 자금세탁방지전문가 자격증까지 땄다. 만약 자금세탁이 걱정된다면 거래량의 90%를 차지하는 4대 거래소가 문제인지, 점유율 0%대 소액 거래소에 문제가 많을지 돌아봐야 한다"며 "준비를 갖췄다면 안 되는 이유는 적어도 직접 나와서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법률 전문가의 비판도 이어졌다. 김태림 법무법인 비전 변호사는 "특금법은 구조 자체가 3년 전 정부와 은행의 논리만 반영해 법안으로 마련된 수준"이라며 "법치 행정의 원리에 따라 감독기관이 직접 심사 기준을 정확히 공개하고 직접 분석하는 구조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또 "불수리할 경우 상세한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이를 보완해 다시 수리받을 수 있도록 기준의 객관화를 하는 것이 올바른 행정"이라고 부연했다.

▲ 지정토론회에서 의견을 개진 중인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 전문가들 (사진=포럼 갈무리)
▲ 지정토론회에서 의견을 개진 중인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 전문가들 (사진=포럼 갈무리)

9일 기준 가상자산사업자 신고 조건을 온전히 갖춘 거래소는 4대 거래소 뿐이다. 그외 은행 문턱에 막혀 ISMS만 획득했거나 심사 중인 거래소는 30여곳으로, 이들은 25일까지 폐업하거나 혹은 원화 없이 코인 간 거래만 가능한 형태로 서비스를 전환해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환전 불가로 인해 이용자의 대거 이탈이 예상되므로 사실상 사업을 장기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김 교수는 "코인을 휴지라고 하지만 그 휴지에 투입된 투자금이 9조원이든 3조원이든 법정화폐로 투자된 것이 현실이며 투자자들의 피해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일본과 한국을 비교 모델로 제시했다. 일본은 2017년 금융청이 거래소 신고를 받아 총 16개를 수리한 후 현재까지 34개 업체가 등록돼 제도권 안에서 운영 중이다. 이들 사업자 중 사고가 발생한 건 그동안 1건에 불과하다. 또 파생상품과 마진거래 비중이 80% 이상으로 도박성이 강한 일본 가상자산 시장과 달리 한국은 마진거래 자체가 불법이다.

김 교수는 "특금법 개정은 이제 소용이 없고 마지막 남은 방법은 일본처럼 적당한 수의 거래소 신고를 수리해 독과점 부작용을 막고 더 나은 서비스 제공 환경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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