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었다고 아는 척 포장하고 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불황이라 먹고 살기가 힘들어져서라면, ‘재주가 그것밖에 안되어서 어쩔 수 없음네’하고 포기하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받는 스트레스는 근원이 다르다. 내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험블(Humble)’했는가, 얼마나 세련되지 못했는가를 보여주는, 그런 것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복잡해져서”라고 치부해버리면 편안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일 수도 있다. 마음 한구석은 더 ‘싸아~’하겠지만.
우선, 커피숍에 가면 그렇다. 예전에는, 정말 예전에는, 그냥 “커피요”하면 알아서 줬다.
조금 시간이 흐른 다음까지도 “맥심이요” 혹은 “원두요”하면 됐다.
이제는?
혹시라도 지인들의 손에 끌려 와인바(Wine Bar)에라도 가면, 속된 말로 ‘돈다’.
위안이 되는 기사가 나왔다.
삼성경제연구소가 CEO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84%가 ‘와인과 관련된 지식을 잘 몰라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단다. ‘와인을 선택하라는 주문을 받을 때’ ‘와인의 맛과 가격 등을 구분하지 못할 때’ ‘와인 용어를 잘 모를 때’ 주로 그렇다는 것이다.
좋은 내용이다. 나같은 와인 문외한들에게는 더더구나 고마운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위로의 말조차 삐딱하게 보인다는데 있다.
“너 말고도 와인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많거든. 그것도 CEO거든. 그러니까 넌 참아라!”라는 윽박지름이 행간에서 자꾸 읽힌다. ‘오바(Over)’인지 몰라도 여기에서 더 나아가, “너도 열심히 와인에 대해 공부하고, 마셔대면 전문가가 될 수 있어!”라는데 이른다.
그러다 문득,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정상인이라면,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결론, ‘음모론’에 도달하고 만다. “국내 와인 열풍의 배경에는 ‘검은 손’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 와인 열풍이 밀어닥친 과정이 너무나 치밀하고, 차분하다.
시작은 모든 유행이 그렇듯 거대한 담론의 일부분으로 시작됐다.
‘기-승-전-결’ 방식으로 짚어보자.
▷ 기 : 국내 ‘웰빙(Well-being)’ 바람이 분다.
국내의 지나친 음주문화가 도마에 오른다.
▷ 승 : 와인에 관심이 쏠린다.
와인이 고급 문화의 하나로 포장된다.
▷ 전 : 동호인들이나 관련 단체들이 결성된다.
각종 매스컴에 등장한다.
▷ 결 : ?
와인이 현시(顯示)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영화나 드라마에 ‘PPL(Product Placement)’로 나오는 것은 물론 최근 들어 국내 최대 민간 연구기관, 나아가 언론들까지 와인 띄우기에 나선다.
그 연구기관의 관심 분야가 산업은 물론 연예·엔터테인먼트 등 생활과 문화영역을 포함하고 있어 스펙트럼이 넓다고는 해도, 산업규모라든지 영향력, 시장성장 전망 등이 아닌, ‘와인과 스트레스와의 상관관계’라는 내용까지가 나오게 된 과정이 정말 알고 싶다.
‘언론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순진한(naive) 생각을 털어버린지 오래라고 해도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신문도 포함해서 방송과 신문들이 그렇게 까지 와인에 대해 관심을 보인 연유가 궁금하다.
이러한 열풍의 배경에는 당연히 우리 국민들의 경제력 향상에 따른 와인에 대한 높은 관심도가 있가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와인 생산국들인 미국·호주·칠레·프랑스 정부들일 수도 있고, 국내 와인 수입·유통회사일 수도 있다(이 시점쯤에서 와인 관련 모든 인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혹시 ‘묵언(黙言)의 마케팅’을 실현하고 있는 코디네이터(Coordinator)가 있다면, 그 분에게 더욱 더).
음모론은 접자. 어쨌거나 대단하지 않은가. 이들은 마트에서 오가는 쇼핑객들을 대상으로 시음회를 한 적은 있을지라도 일반에 대고 와인을 마셔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은 없다. 다만 적당한 와인음주는 건강에 좋고, 와인을 모르면 기업체 CEO 10명 중 8명 이상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래도 국내 와인 인구의 저변은 점점 두터워지고 있다.
결론을 채우기는 섣부르다. 확실한 것은 와인이 우리나라에서 외산 담배보다는 훨씬 연착륙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와인의 국내 토착화 과정이 너무나 자본주의적이며, ‘세계화(世界化)’라는 추세에 부합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여기에서 ‘국산 술 음주’ 운운하는 것은 ‘쇼비니즘(chauvinism)’에 다름 아니다. 나아가 어차피 자본과 아이디어가 결합한 ‘경제 전쟁터’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소주와 막걸리 세력’이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조심스럽게 뚫고 들어오고 있는 ‘와인 세력’의 전략이다. 그 나라의 문화와 현실을 잘 이해하고, 아이템을 선택한 후, 우군(友軍)을 만들어 함께 진격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 강도 조절은 필수다.
우리도 똑같이 소주와 막걸리를 들고, 미국이든, 칠레든, 호주든, 프랑스든 가야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