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삼성 암흑기·이재용 ‘치욕의 시간’
반도체 초호황에 미국 우선주의가 삼성 살려
사업지원실, 지원·조율 말고 결정하고 실행을
재무·관리 전문가 대신 혁신 주도 리더 필요
기업문화 쇄신하고 지배구조 전향적 재검토도
뛰어난 오너가 있는 대기업에서 어느 날 갑자기 오너 유고사태가 발생해 불가피하게 젊은 후계자가 총수에 오르더라도 하루아침에 유능한 경영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 참모들이 아무리 잘 보좌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하게 자리를 맡은 만큼 반드시 수업료를 치르게 됩니다. 이에 승계를 물 흐르듯이 어떻게 잘하느냐에 그룹의 미래가 좌우됩니다.
삼성그룹이 그랬습니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진 후 이재용 회장이 그룹 총수로서 경영 전면에 나섰지만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며 총 560일, 1년7개월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2020년에는 검찰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와 관련해 다시 이 회장에게 칼을 들이댔습니다.
부당합병과 분식회계 재판은 4년간 진행된 끝에 올해 2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이 내려졌지만 10년에 걸친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은 이 회장은 물론 삼성 수뇌부 모두의 에너지를 빼앗았습니다. 특히 이에 따라 삼성은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투자와 인수합병(M&A)에서도 실기(失機)하고 말았습니다.
이 회장이 옥살이를 하고 재판을 받는 동안 그룹을 떠받친 것은 국정농단 사태 당시 과도한 권한 집중이라는 비판으로 2017년 2월 해체된 미래전략실을 대신해 등장한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와 정현호 부회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임시조직'이었고 ‘지원조직’에 불과했기에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정 부회장 역시 재무 전문가로서 투자보다는 관리에 방점을 찍었고 오너의 사법 리스크 해결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장기간 사법 리스크에 시달려온 오너와 ‘빈 카운터(bean counter; '콩알 세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재무회계 및 관리 전문가를 지칭함)'라는 비아냥까지 듣는 임시 지원조직 사업지원TF가 끌어가는 삼성의 성과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 유고사태 이후부터 2025년 2월 이재용 회장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10년은 삼성 역사의 ‘암흑기’였습니다. 삼성의 3세 최고경영자(CEO)인 이 회장에게는 ‘치욕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재용 회장이 낸 비싼 수업료
인공지능(AI) 시대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총아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만년 2위였던 SK하이닉스에 1위 자리를 빼앗기며 메모리반도체 전체 시장에서도 2위로 밀렸습니다. 재무 중심의 빈 카운터 리더들이 눈앞의 계산기만 두드린 결과였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또 다른 축인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대만 TSMC와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졌습니다.
삼성전자가 초일류, 초격차 기업에서 평범한 기업으로 추락하는 사이 ‘인재제일주의’ 삼성에서 인재가 줄줄이 떠났습니다. 조직문화도 무너져 지난해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파업이 일어났고 쟁의행위도 잇달았습니다. ‘삼성위기론’이 급부상했고, 경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삼성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대개 한 기업이 3년 이상 정체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통계적으로, 실증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삼성전자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반도체 산업에서 울트라 슈퍼사이클(초호황기)이 찾아온 것입니다.
올해부터 본격화한 반도체 호황은 2017~2018년 호황과는 질적으로 다른 장기 슈퍼사이클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AI가 학습에서 추론으로 확장되면서 HBM뿐 아니라 기존 레거시메모리 수요도 급증합니다. 자율주행, 로봇, 공장자동화 등 이른바 ‘피지컬AI’의 성장으로 새로운 수요도 끊임없이 창출됩니다. 일부 증권사들은 이러한 초호황을 고려할 때 경기 정점이 예상되는 2027~2028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100조원을 넘고 TSMC를 추월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합니다.
삼성전자가 갑자기 위기론을 벗어나 초호황을 맞은 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자국우선주의에 따른 대중국 제재와 미국 내 공장 유치가 한몫을 했습니다. 엔비디아가 삼성·SK·현대자동차와 ‘AI동맹’을 맺고 수만장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공급하기로 하고 SK하이닉스에 이어 삼성전자 HBM까지 받기로 한 결정도 이런 흐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동맹국들에는 관세 부담을 주지만 삼성에는 오히려 구세주 같은 존재입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라는 ‘기적’
지난 여름 삼성전자가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로부터 165억달러 규모의 차세대 AI 반도체 AI6 생산 파트너로 선정되고 팀 쿡의 애플과 미국 텍사스 오스틴 삼성전자 공장에서 첨단 이미지센서를 공급하기로 계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때 사업철수설까지 돌았던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및 파운드리 사업이 회생의 돌파구를 마련하게 됐습니다.
2025년은 삼성 부활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7월 이 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 회계 처리 관련 대법원 재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상반기까지만 해도 비관적이던 반도체 경기가 하반기 들어 하루아침에 초호황으로 돌아섰습니다. AI와 트럼프 대통령이 삼성전자와 이 회장에게 부활의 기회를 준 셈입니다.
상황이 급반전되자 자신감을 얻은 이 회장은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삼성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요구가 높았던 사업지원TF 조직 개편과 인사에 나선 것입니다. 삼성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 조직을 안정적으로 끌어온 공은 인정되지만, 보수적 경영으로 삼성전자 위기에 책임이 있는 ‘2인자’ 정 부회장을 물러나게 하고 그 자리에 같은 재무통이지만 기술 이해도가 높은 박학규 사장을 앉혔습니다. 정 부회장의 퇴진은 자발적 용퇴지만 세대교체의 의미를 내포하며 새로운 경영체제와 비전을 담은 ‘이재용 2.0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값비싼 대가 끝에 드디어 이 회장이 이끄는 ‘뉴 삼성’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재용 2기 체제’가 시작됐습니다.
2기 이재용 체제에서 정 부회장의 퇴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업지원TF를 해체하고 사업지원실을 신설한 것입니다. 과도기 임시 비상경영 체제를 끝내고 이 회장의 사업구상과 미래전략을 본격적으로 실행할 최상위 조직을 출범시킨 것으로 풀이됩니다. 사업지원실은 전략팀, 경영진단팀, 피플팀에 이어 M&A팀까지 갖춰 삼성전자와 전자 계열사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그룹 전반의 혁신과 성장을 주도하며 계열사에 대한 장악력도 높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혁신과 성장 주도할 박학규 사업지원실
삼성은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해체된 과거 미전실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사업지원실 신설이 미전실 부활은 절대 아니며 사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조직보강 차원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한가한 때가 아닙니다. 정치권력이나 여론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제대로, 빠르게 실행하고 혁신해야 합니다. 신설된 사업지원실이 지원과 조율에만 머물고 결정과 실행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면 기대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지원 기능을 보강하는 것만으로는 투자와 M&A에서 속도감 있는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빠르고 실질적인 의사결정으로 내부 문화의 변화까지 도모하는 강한 실행력이 필요합니다.
자본시장에서는 박 사장이 이끌 사업지원실을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사업지원실 핵심 인사들이 대부분 사업지원TF 출신인 데다 재무통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는 사업지원TF처럼 사업지원실도 과연 투자와 혁신을 제대로 이끌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현재 삼성의 긴급 과제는 HBM 메모리반도체 부문의 리더십 탈환, 파운드리 2나노 수율 개선과 고객 신뢰 확보, 첨단 패키징 투자와 기술혁신, AI생태계 구축 등입니다. 재무관리를 넘어 반도체·파운드리·AI 등 신성장산업에서의 속도전과 초격차 전략이 핵심입니다. 재무통만으로는 이런 과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2기 이재용 시대를 이끌 박 사장의 사업지원실은 시장의 걱정과 우려를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삼성도, 사업지원실도 더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조만간 단행될 사장단 및 임원인사에서는 이런 부분을 보완해야 합니다. 시장은 재무와 관리 전문가가 아니라 혁신을 주도하고 성장동력을 창출할 리더를 원합니다.
이 회장 ‘경영 시간’ 길어야 20년
이재용 2기 시대의 최우선 과제는 미래기술과 신사업 주도권 확보지만 조직문화 혁신과 지배구조 개선도 매우 중요합니다. 삼성이 HBM 개발이나 파운드리 사업에서 경쟁사에 밀린 것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토론하고 협업하는 문화(SK하이닉스), 협력을 통한 생태계 조성(TSMC) 같은 기업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기업문화라면 인재들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HBM도, 파운드리도 모두 ‘을(乙)의 비즈니스’입니다. 삼성에는 ‘갑(甲)의 문화’만 남아 있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을의 비즈니스를 잘하지 못합니다. ‘박학규의 사업지원실’에 대한 가장 큰 우려도 이 지점입니다.
이 회장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지포스 행사에 참석해 과거에 자신이 거만했다고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회장뿐 아니라 삼성 경영진 모두가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삼성생명 회계 논란, 상법개정과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은 삼성이 지배구조에 대해서도 전향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이 회장이 2세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만큼 지배구조 이슈도 과거와는 다르게 검토해야 합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팔면 삼성의 지배구조가 흔들리기 때문에 한 주도 매각할 수 없고 따라서 유배당 계약자들에게 배당도 할 수 없다는 낡은 논리는 이제 지양해야 합니다. 이해진 네이버 의장은 계열사 우호지분 하나 없이 3.7%의 지분만으로도 총수 역할을 제대로 합니다. 기업 경영은 지분이 아니라 성과와 리더십으로 하는 것입니다. 박학규의 사업지원실은 지배구조 이슈 역시 전향적으로 검토하기 바랍니다.
1968년생인 이 회장은 올해 57세로 남은 경영 시간도 길어야 20년 정도입니다. 삼성도, 이 회장도 예상치 못한 반도체 초호황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경기가 언제 다시 꺾일지 알 수 없습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1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AI 버블론에 대한 우려도 여전합니다. 심지어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AI 버블로 세계 경제를 10년 이상 침체에 빠뜨릴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까지 나옵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끝나거나 AI 버블이 현실화될 때 삼성과 이 회장의 진짜 실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세운 ‘초격차’가 무너지고 이재용 회장의 첫 10년이 실패로 끝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리더십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낡은 기업문화입니다. 기술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지난 10년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 회장도, 사업지원실도 이제는 더 이상 실패하면 안 됩니다. 누가 뭐래도 삼성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호국신산(護國神山)이며, 삼성이 무너지면 대한민국도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