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금융당국과 정치권이 추진 중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시장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기업이 사들인 자사주를 일정 기간 내 반드시 소각하도록 해 주주가치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얼핏 들으면 합리적이고, 나아가 시장 친화적인 정책처럼 보인다. “주주환원 강화”라는 구호는 언제나 듣기 좋다.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자사주를 바라보는 온도는 밖에서 보는 시선과 다르다. 자사주를 두고 시장이 기대하는 역할과 기업이 체감하는 무게도 다르다. 흔히 ‘주주환원’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그 이면의 층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필요할 때는 사채 발행이나 임직원 보상 수단으로, 위기 때는 주가 방어와 유동성 확보의 카드로 쓰인다. 어떤 기업에겐 불확실한 시장 속에서 쓸 수 있는 ‘전략적 완충재’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자사주를 일정 기간 내 반드시 소각하라고 하면 기업의 선택지는 한 방향으로만 고정된다. 통계상 상장사 10곳 중 7곳이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규모는 약 76조9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중 72조원가량이 소각 대상이다. 상장사 전체 현금성자산의 절반을 웃도는 규모다. 법이 시행되면 이 자산이 불과 1년 안에 사라지게 된다.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시장 불확실성에 대응할 수 있는 완충 장치, 즉 ‘위기 대응 여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대기업에겐 이 변화가 감내 가능한 수준일지 모른다. 충분한 현금흐름과 자사주 매입 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소·중견기업에겐 이야기가 다르다. 분기마다 수천억 단위의 잉여현금을 창출하는 대기업과 달리 영업현금흐름 자체가 마이너스인 경우가 허다하다. ‘동일한 규제’라고 해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재무 체력은 이미 출발선부터 다르다.
문제는 이 제도가 단순히 ‘주주환원’의 영역을 넘어 중소기업의 자금 운용과 의사결정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자사주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는 곧 기업의 대응력과도 직결된다. 이 여유가 사라지면 경영은 자연스레 방어적으로 바뀔 여지가 크다. 위기 국면에서 과감한 투자보다 현금 보전에 집중하게 되고, 성장보다 생존을 우선하게 될 수 있다. 선의로 설계된 제도가 오히려 시장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이유다.
일부 기업이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에 활용해 온 것은 사실이다. 비용 없이 특정 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이른바 ‘자사주 마법’이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것도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처럼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필 제도가 없는 시장에서는 자사주가 사실상 유일한 방패였을지도 모른다. 이를 일률적으로 없애면 특히 경영권이 취약한 중소기업은 외부세력의 공격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 투명성을 높이려다 오히려 불확실성을 키우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번 논의의 핵심은 ‘자사주를 소각하느냐’보다 ‘그 소각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느냐’에 있다. 자사주 소각이 자율적으로 이뤄질 때 그것은 경영진의 자신감을 상징했다. 시장은 그런 신호를 읽는다. 기업이 스스로 결단한 행동은 강제된 의무보다 훨씬 강한 신뢰를 준다. 그래서 시장은 ‘의무’보다 ‘의지’에 반응한다. 하지만 의무화되면 그 의미는 “정부가 시켜서 하는 일”로 바뀐다. 시장은 이를 신뢰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형식적 순응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코리안 디스카운트’의 배경에는 자사주 소각 여부보다 훨씬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 있다. 기업과 투자자 간의 신뢰, 정책의 일관성, 소액주주 권리 보호의 미비 등이 그중 일부다. 이런 구조적 요인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사주 소각을 강제하는 것은 근본 처방이라기보다 단기 해법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책상 위에서 보면 깔끔한 제도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선 그 깔끔함이 때로는 냉혹하게 작동한다. 시장이 바라는 것은 새로운 규제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질서와 꾸준히 쌓인 신뢰다. 신뢰는 규제가 아니라, 일관된 행동에서 나온다. 시장은 그 차이를 정확히 안다.

